출산은 이제 '역행자'가 되어버린 사회
합계 출산율 0.7, 8월 출생아 수는 2만 명이 붕괴되었다. 3주 전 23년 10월에 태어난 나의 아들은 더 적은 인원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연금고갈, 집값 폭등, 대립과 논쟁, 비교문화 속에서 행복을 찾기란 어렵고, 남아있는 행복감을 강탈당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잘 다니던 가스공사를 퇴사열풍이 불기 몇 년 전이던 2018년 1월에 이미 뛰쳐나와버린 나는 2023년에 토목구조기술사이자 N잡러가 되었다. 당시 나의 행동은 요즘 관점에서 나름의 역행자였다. 신입사원시절 청운의 꿈을 안고 미리 퇴사 준비를 해왔지만 가까운 주변의 반응은 걱정이 더 앞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6년째 살아남아 즐겁게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내가 또다시 인생 '하드모드'를 선택했다. 나와 아내를 닮은 아이를 갖는다는 것. 자신의 dna를 후손 대대로 번식하고 유지하고 싶은 욕구는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본능이다. 하지만 지금 2023년 10월의 대한민국에서는 본능 내지 욕구보다는 현실이 더 앞선다. 그렇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이제 2030 주변인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지인들 중에는 집안의 경제적인 여유가 충분함에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치를 가진 전문직임에도 자녀를 낳지 않거나 미루는 사례는 너무 많았다. 이런 상황이니 직장이 불안정하거나 빠듯한 경우에는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미련하게끔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아내가 이 흐름을 역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돌이켜보았다.
우연히 인터넷 모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을 본 적 이 있다. 자식을 낳았는데 본인들이 부족하면서(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신을 왜 낳았냐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에 관한 글이었다. 이런류의 글은 주기적으로 익명의 커뮤니티에 올라온다. 나도 해당 글을 처음 보았을 때는 아이를 낳을 마음을 가지기 전이어서 마찬가지로 의구심과 걱정이 들었다. 해당 글의 주류 댓글은 아이를 낳으면 행복하다, 힘들지만 더 큰 행복을 준다, 힘이 난다 등의 댓글이었다. 이에 대해 글쓴이는 반문했다. '그건 부모의 입장이고, 자식의 입장에서는 힘든 세상에 불행한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 이에 대해 시원한 반박을 보지 못하자, 나는 만나는 자녀를 가진 지인을 만날 때면 같은 질문으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형, 만약에 자식이 나중에 둘이 잘 살지 자기 왜 낳았냐고 힘들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이 질문에 대해 무릎을 탁 치며 '아 내가 생각이 짧았다'라는 판단이 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하였다. 논리적으로 반박이 어려운가에 대해 고민하던 중, 의외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친한 동생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먼저, 동생은 나에게 지금 삶이 만족하고 행복하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삶은 행복하지만 아직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동생은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미래의 자녀와 함께하면 어떨지 생각해 보라 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는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성취와 배운 점을 미래의 자녀와도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동생은 해당 자녀는 존재하지 않는 자로 무존재인 태어날 아기가 행복할지 불행할지 알지 못하는데 해당 글은 불행을 당연하다고 전제한다고 하였다. 존재하지 않는 아기의 불행(미래의 결과)은 정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자 전제가 참이 아니므로 결론도 거짓이었다는걸 느꼈다. 그래서 원 글의 논리적 오류가 느껴졌고 앞선 대화를 바탕으로 미래의 과정을 함께 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SNS를 통한 비교의 홍수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나와 아내는 우리만의 관점으로 아이의 다중행복을 찾는데 기여하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