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고른 전공
그렇다. 제목 그대로 나는 대학교 1~2학년 때 성적표를 조작했다. 물론 잘못된 정보를 제공받은 가족 외에는 피해를 주진 않았다. 피해를 줬다면 내가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니 안도하시라. 당시 대학 성적표는 우편으로 배송되기도 했고 온라인확인도 가능했다. 난 집주소를 이사오기 전에 살던 집주소로 바꿨고, 성적표는 친구가 대신 받아줬다. 온라인 성적표는 어설프게 그림판으로 조작했다.
당시에는 복학하고 성적을 메꾸지 않을까 라는 얕은 이유도 있었고, 조금 더 심오한 이유도 있었다. 과거 나는 대입에서 원하는 결과를 못 얻어 재수를 하려고 했었다. 부모님과의 의견 차이로 실랑이를 하다 대학에 일단 지원하고 입학했다. 열심히 하겠다던 약속과 성적과의 괴리는 매우 심했다. 공부에 흥미도, 동기도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입대 전 과에서의 성적은 뒤에서 3등이었다. 친구들에게도 말 못 한 사실이다.
입학할 때 과를 졸업하고 나서의 진로와 직무를 제대로 알고 지원하는 수험생은 많지 않다. 나는 막연히 과천에서 등하교할 때 보곤 하던 ‘수자원공사’에 가고 싶었다. 왠지 ‘환경공학과는 수자원공사랑 연관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더 자세히 찾아보지 않았다. 자세한 정보도 없이 입학한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토목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 어려움이 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나는 어릴 때보던 시트콤의 단편적인기억들 덕분에 대학생활에 로망이 있었다. 막연히 나도 대학생이 되면 여자친구가 바로 생길 줄 알았다. 대부분 그렇듯 수능에 맞춰 입학하고 나면 생각과 다른 현실에 당황한다. 나는 당황을 넘어서 방황했다. 몇 주 다니다 선배들에게 듣게 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환경공학과는 취업이 잘 안 된다더라. 둘째, 환경공학을 제대로 배우려면 석사까지 마쳐야 한다. 나는 대입을 실패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일 뿐이다. 학교에 대한 비하는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대학원까지 공부를 오래 하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선배들은 학과 커리큘럼이 ‘토목’ 위주라고 했다. 결론은 토목을 위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어려움도 만났다. OT 때까지는 잘 몰랐다. 21세기에도 토목과에 군기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절대 비하나 비난, 또는 비판을 유도하려는 목적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단지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이기에 말하는 것이다. 선배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시스템을 시간이 지나고 서야 이해했다. 좋게 말하자면 개성 있는 옷차림으로 인생 상담을 듣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 잠이라도 자면 선배들이 수업을 잘 들을 수 있게 도와줬다. 학과행사에 빠지면 모두 한 곳에 모여 전원이 올 때까지 다 같이 한마음으로 기도 했다. 이후 편입을 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것을 이해했지만, 그 당시의 나에겐 지옥 같았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방황을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를 기억하는 모두에게 난 ‘범생이’였다. 선생님들은 모두 날 좋아했고 어머니 지인 분들도 나를 좋아했다. 무색무취한 나였지만, 딱히 나를 싫어할 사람도 없었다. 무미건조한 삶을 바꾸고 싶었기에, 대입과 동시에 살을 17킬로그램이나 감량했다. 한번 제대로 놀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방황의 시작이었다.
학교 수업은 한 달 가까이 안 나가고 대리출석을 했다. 거의 시험만 보러 가다 보니 계절이 바뀌기도 했다. 이 모임 저모임 다니며 종횡무진 서울 곳곳을 누볐다. 그러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듯 군대에 갔다. 공군에 가서 다행히 좋은 보직을 받아 일병 때부터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재수, 전문대학원 준비, 취업 준비를 두고 끝없이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고등학교 때 가고 싶던 수자원공 사가 생각나 취업을 염두에 두고 스펙을 알아보았다. 전문 대학원 1차 합격조건에 필요한 영어점수를 첫 목표로 잡고 나는 스펙을 쌓기 시작했다. 다행히 공군 중에서도 보직을 잘 받아 여가시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