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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란 Oct 17. 2024

환한 세상

  오늘 우리 아파트단지 2000여 세대 전체가 노후 변압기 교체를 위해 하루 종일 정전이란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전기가 나가니 대비를 하라고 한다. 

  “혹시, 생명유지 장치를 이용하는 환자가 있는 세대는 별도로 관리실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생명유지장치를 이용하는 사람은 없으니, TV는 안 보면 되고, 와이파이는 데이터를 이용하면 되고, 노트북은 충전된 배터리로 오전은 가능하다. 냉장고만 미리 대비해 두면 될 것 같았다. 

 시간이 한 시간 앞으로 다가오자 갑자기 정수기물도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기가 나가기 전 정수기물을 부랴부랴 받아두었다. 먹을 물은 확보해 두었다. 전기가 나가면 커피도 못 먹을 테니 얼른 커피도 한잔 타 두었다. 하루 한잔 먹으니 그 정도야 약과다. 냉장고는 하루 종일 전기가 나가면 냉동실에 얼려 둔 아이스팩을 냉장실로 옮겨놓으면 10시간 정도는 문제없으리라 생각되었다. 전기가 나가자 얼려놓은 아이스팩 여러 개를 냉동실로 옮겨두니,  냉장고는 임시 아이스박스가 되었다. 만사 오케이다. 일반용수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물탱크의 물이 나오겠거니 했는데 설거지를 하려고 보니, 물이 나오지 않는다. 물을 받아놓지 않아 물이 한 방울도 없는 상태인데 아뿔싸 큰일이었다. 화장실을 하루종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대로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과 궁여지책을 이야기했다. 일반용수를 하나도 받아두지 않았으니 한번 사용하고 나면 물이 없을 것이다. 작은 볼일은 냄새가 좀 난들 어쩌랴. 화장실 문을 닫아두고 있지 뭐. 

 “큰 볼일을 봐야 하면, 우리 길 건너 자주 다니는 병원 건물이나, 은행에 가서 볼일 봅시다.”

  "엘리베이터도 안될 테니 내려가지도 말고, 잘 참읍시다."
 노트북으로 작업해야 하는 게 좀 있었다. 충전된 노트북의 배터리가 나갈 즈음인 오후에 집 앞 무인카페에 가서 하루종일 있다 오리라 마음먹었다. 우리 나이에 무인카페에 가서 노트북 켜놓고 작업하는 할머니가 될 정도면 신식 할머니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루를 그렇게 호사를 누리기로 했다. 내려갈 일이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남편이 일반용수 화장실에서 물이 나온다며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물이 나와.”

 수돗물 나오는 것이 무슨 그리 큰일이 되었는지 반기는 것이다. 가서 보니 정말 물이 콸콸 나왔다. 화장실 사용의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 화장실에서의 지린내 걱정은 덜게 되었다. 물이 정말 반가웠다. 그새 나오다가 또 중지될까 봐 욕조에 물을 받느라 서두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이 가만히 안내문을 보더니 비상발전으로 수돗물과 엘리베이터까지는 된단다. 전기를 모두 차단시키고 비상발전기를 돌리는 그 시간 동안만 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안내문을 제대로 보지 않고 걱정만 했던 것이다.

  오전 내내 노트북을 켜놓은 채로 작업을 하고 나니, 배터리 남은 양이 점점 줄어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배낭에 노트북과 작업할 자료들을 가지고 무인카페로 갔다. 무인카페에 가니 한 사람만 앉아 있다. 나도 처음 간 무인카페 한쪽 테이블에 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커피를 뽑으려고 보니 낯설기도 하다. 60 후반, 할머니가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들고 앉아 있으니, 젊은이 대열에 가까이 간 듯 느껴져 뿌듯하다. 오후 내내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좀 더 일찍 혹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6시경에 집으로 갔다. 벌써 어두워지는데 집에 불은 오지 않았다. 캄캄해지자 짜증이 났다. ‘좀 더 환한 이른 아침시간에 시작해서 일찍 끝내면 좋을 텐데.’ 하다 작은 아들집을 떠올렸다. 아침에 아이들 데리고 출근하고 등원시키려면 9시까지 마무리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그렇겠지, 오죽 알아서 시간을 정했으랴.’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집안 이곳저곳을 다녀야 할 상황이 되어버렸다. 남편에게 집안에서라도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면서 조심조심 왔다 갔다 했다. 서로 불을 켜주며 행여나 넘어 질까 봐 걱정해 주는 동지애가 살그머니 움트고 있다. 그건 좋은 현상인 듯하다. 잠시 있다 뒷동을 보니 전기가 들어와 있다. “뒷동은 전기 왔어요.” 남편에게 소리소리 질렀다. 남편도 뒷동을 쳐다보며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 ‘우리도 곧 들어오겠지.’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 짧은 5분 정도의 부러움이 정말 크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우리 동도 드디어 불이 들어왔다. 집안이 환해졌다. “와~!” 탄성이 나온다. 냉장고를 열어보기도 했다. 앞동은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앞동에서 또 우리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이 환한 세상이 어제의 환한 세상보다 훨씬 더 환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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