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이 듦 나이 탓

by 이경란

모처럼 한가한 오전, 늦잠까지 잤다. 부스스한 얼굴로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있어도 마음이 편안한 시간이다. 오후에 손녀 하원 시키러 가야 하는 시간만 잘 지키면 되는 날이라 늦게 일어나도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따르르르릉.”

낯선 분은 아니지만, 내게 따로 전화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이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두 달 전쯤 D협회의 일로 한 번 통화한 적은 있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 분이었다. ‘무슨 일이지?’ 하고 전화를 받았다.

“이경란 선생님이시죠? 어디쯤 오셨나요? 제가 좀 늦을 것 같아서요.”

“네? 무슨 일이신지….”

그제야 며칠 전 MOU 건으로 전화하며 약속했던 기억이 났다. 오늘 이 선생님과 함께 우리 협회와 K자서전협회의 업무 협약을 맺기 위해 사전 협의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협회의 자서전 출판위원회 동아리 활동을 맡아 자체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으니, 이 일을 추진하는 데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었다. 사전 협의를 위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조율하고 결정해 두었던 날이다.

이런 일이 있으면 핸드폰 다이어리에 반드시 기록해 두는데, 그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다른 교육을 받고 있는 중에 MOU 관련 전화 연락이 와서 잠시 강의실 밖으로 나가 약속 장소와 시간을 조율한 뒤 다시 들어갔다. 그리곤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정년퇴직 후 시간 여유가 좀 생겼다고 생각해서 요즘은 무엇인가를 배워보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날도 다른 교육을 받으며 짬짬이 전화를 받느라 집중하지 못했던 탓에, 결정된 내용을 강의 후, 다이어리에 기록해야지 해놓곤 잊어버리고 말았다.

두 가지 일을 하면 한 가지를 잊어버리는 일들이 요즘 잦다. 두세 가지 일을 하면서도 메모와 체크를 통해 모든 일을 철저히 해왔던 내가 이렇게 완전히 잊어버리다니. 결국 이 궁리 저 궁리를 해 보기도 하고, 이 선생님께 혼자 미팅을 진행해 달라고 부탁해 보았지만 도저히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서울 시내 웬만한 거리는 한 시간이다. 우리 집은 서울의 강서 남쪽이고, 목적지는 강북 서울의 북쪽 끝에 가깝다. 승용차로 가면 어디서 어떻게 막힐지 알 수가 없고, 그나마 지하철로 가는 게 정확하다. 지하철로도 한 시간 이상이다.

“선생님이 먼저 가 계십시오. 제가 서둘러 가겠습니다. 한 시간 이상 걸릴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난감한 상황이다. 서둘러 준비해 나가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지하철에서 달리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바로 앞에 눈에 띄는 식당이 있었다. 그곳에 가서 점심 식사라도 대접해야 미안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팅 장소인 『○연구소』로 들어섰다.

지각한 나를 10살이나 연세 높으신 그분은 너그러운 미소로 맞아 주셨다. 나이 듦이 돋보이는 모습이다. 이미 미팅 대상인 연구소 대표와 업무협약 이야기도 마무리 지어놓은 뒤였다. 마무리된 이야기를 듣고 식당 봐 둔 곳이 있으니 함께 가시자고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지난주 월요일에도 수채화 강의 듣는 날이었는데 완전히 깜빡하고 시간이 절반이상 지난 뒤에야 생각나 결석하고 말았다. 나이 탓을 해 본다.


앞으로는 핸드폰 다이어리에 빠짐없이 기록해 두리라 다짐한다. 아직은 나이 탓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말이지, 핸드폰 다이어리를 안 보면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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