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탓 1
모처럼 한가한 오전이라고 생각하고 늦잠까지 잤다. 푸스스한 얼굴로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있어도 마음이 편안한 시간이다. 오후에 손녀 하원 시키러 가야 하는 시간만 잘 지키면 되는 날이니 늦게 일어나도 여유로운 아침이다.
“따르르르릉”
낯선 분은 아니지만 내게 따로 전화 할리가 없는 이 00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두 달 전쯤 ◇◇협회의 일로 전화를 한 번 주긴 했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 분인데 ‘무슨 일이지?’하며 전화를 받았다.
“이경란 선생님이죠? 어디쯤 오셨나요?, 제가 좀 늦을 것 같아서…”
“네? 무슨 일…”
그제야 며칠 전 MOU건으로 전화하고 약속했던 기억이 났다. 오늘 이 00 선생님과 ◇◇협회와 □□자서전협회의 업무협약을 맺기 위해 사전 협의하기로 한 날이다. 나는 ◇◇협회의 자서전출판위원회의 동아리 일을 맡아 자체활동을 하고 있으니, 이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 업무협약하기 위한 사전협의를 위해 그날 약속장소와 시간을 조율하고 결정도 내가 해 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있으면 핸드폰 다이어리에 반드시 기록을 해 두고 있는데 그날은 미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곤 깜빡 잊어버렸다. 변명을 하자면 그날의 약속장소와 시간을 조율할 때 다른 교육을 받고 있었다. 정년퇴직하고 시간이 좀 있다고 생각해서 요즘 무엇인가 배워보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그날도 교육을 받으며 짬짬이 전화로 약속하느라 집중되지는 못했다. 약속시간과 장소까지 결정하고는 다이어리에 기록해야지 하면서 강의실로 들어가 강의 들으며 그 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두 가지 일을 하면 한 가지는 잊어버리는 일들이 요즘 잦다. 두세 가지 일을 하면서도 메모와 체크를 하면서 잊지 않고 모든 일들을 철저히 해 왔던 내가 이렇게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 궁리 저 궁리를 해 보기도 하고 이 00 선생님 혼자 좀 해 달라고 부탁하다가 도저히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선생님이 먼저 가 계십시오. 제가 서둘러 가겠습니다. 한 시간 이상이 걸릴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서둘러 준비해 나가면서 온갖 생각이 다 든다. 나이 탓을 하게 된다. 지난주에도 월요일 수채화 강의 듣는 날인데 완전 깜빡하고 있다가 시간이 지난 후 생각나서 자동 결석을 했었다. 정말 나이 탓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핸드폰 다이어리에 빠짐없이 기록해 두리라. 그리고 매일매일 그것을 확인하며 살아야겠다.
나이 탓 2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렀다. 오늘 오전 다른 일정이 두 개나 있었으나 모두 취소하고 이건 꼭 가리라 마음먹었다. 가까운 곳에서 무료 강좌를 4회 진행하는데 내가 배우고 싶어 하는 픽슬러이다. 다른 사진이나 영상편집도 간단한 것은 할 수 있으나 픽슬러는 좀 더 전문적인 듯 보인다. 2시간씩 4회 무료이니 내가 바라던 바이다. 4회를 마치고 나면 좀 더 멋진 사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꿈에 부풀었다. 잊지 않으려고 신청 후 핸드폰 다이어리에 매주 기록해 두었다. 나이 탓을 하며 잊지 않으려고 다짐했으니, 실천하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늦을 세라 승용차도 끌고 나왔다.
시간 맞추어 50 플러스 센터에 도착할 수 있었고, 강의실을 찾아 올라갔다. 거의 시간에 맞추어 왔다. 강의실인 컴퓨터실로 가니 벌써 사람들이 모두 온 듯 꽉 차 보인다. ‘사람들이 엄청 시간 맞추어 빨리들 왔구나.’하며 등록부에 등록하려고 볼펜을 집어 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내 이름이 없다. 무엇이 잘못된 것 같다. 내가 분명히 신청한 것을 확인하고 왔는데. 이분들이 왜 내 이름을 빠뜨린 건지 따지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이름이 없네요.”
“수강 확인 문자 받고 오셨어요? 수강 결정된 분들은 어제 모두 문자 보내었는데요.” 가만히 생각하니 수강 확인 문자는 받지 못했다. 내가 수강 신청한 것만 생각하고 깜빡 잊을까 봐 걱정하면서 메모해 둔 것이다.
“아니, 못 받았어요.”그제야 제한하는 문구가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양천구민 우선, 40~64세 해당되지 않는 분은 일주일 후부터 순차적으로 승인됩니다.’
미처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천구민으로 우선 대상이긴 하지만, 65세 이상의 나이 때문에 곧바로 승인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문제였다. 나도 꼭 배우고 싶은 것인데 밀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되돌아 나왔다. 따지듯 내 이름 없다고 말했으나 되돌아 나와야 하니 뒤통수가 부끄러워졌다. 나이 많은 게 제약이 되어버렸다. 나이 때문에 잊을까 봐 애를 쓰며 확인하고 확인했던 내 모습이 다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