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환한 세상

by 이경란

오늘 우리 아파트 단지 2000여 세대 전체가 노후 변압기 교체를 위해 하루 종일 정전이란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전기가 나가니 대비하라고 한다.

“혹시 생명 유지 장치를 이용하는 환자가 있는 세대는 별도로 관리실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생명 유지 장치를 이용하는 사람은 없으니, TV는 안 보면 되고, 와이파이는 데이터를 이용하면 되며, 노트북은 충전된 배터리로 오전에는 사용할 수 있다. 냉장고만 미리 대비하면 되겠다.


정전이 한 시간 앞으로 다가오자 갑자기 정수기 물도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수기 물은 부랴부랴 확보해 두었으나, 전기가 나가면 커피도 못 마실 것 같아 얼른 한 잔 타 두었다. 냉장고는 냉동실의 아이스팩을 냉장실로 옮겨 놓으면 10시간 정도는 견딜 수 있으리라. 전기가 나가자 얼려 둔 아이스팩 여러 개를 냉장실로 옮겨 임시 아이스박스로 만들었다. 만사 오케이다.

일반용수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물탱크의 물이 나오겠거니 했는데, 설거지를 하려고 보니 물이 나오지 않았다. 받아놓은 물이 한 방울도 없는 상태였고, 아뿔싸 큰일이었다. 화장실을 하루 종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대로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과 궁여지책을 논의했다. 일반용수를 조금도 받아 두지 않았으니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물이 없을 것이다.

작은 볼일은 냄새가 좀 나도 어쩌겠냐며 화장실 문을 닫아 두기로 했다.

“큰 볼일을 봐야 하면, 우리 길 건너 자주 다니는 병원 건물이나 은행에 가서 봅시다.”

“엘리베이터도 안 될 테니, 내려가지도 말고 잘 참읍시다.”

노트북으로 작업해야 할 것이 좀 있었다. 충전된 노트북 배터리가 나갈 즈음인 오후에 집 앞 무인카페에 가서 하루 종일 있다 오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나이에 무인카페에서 노트북 켜 놓고 작업하는 정도면 신식 할머니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루를 그렇게 호사스럽게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남편이 일반용수 화장실에서 물이 나온다며 들떠 말했다.

“와, 물이 나와!”

수돗물이 나오는 것이 무슨 그리 큰일이 되었는지 반가워했다. 가서 보니 정말 물이 콸콸 나왔다. 화장실 사용의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 화장실에서의 지린내 걱정을 덜게 되었다. 물이 정말 반가웠다. 그새 물이 나오다가 또 중지될까 봐 욕조에 물을 받느라 서두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이 가만히 안내문을 보더니, 비상 발전으로 수돗물과 엘리베이터는 된단다. 전기를 모두 차단하고 비상 발전기를 돌리는 그 시간 동안만 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안내문을 제대로 보지 않고 괜한 걱정만 했다.

오전 내내 노트북으로 작업하고 나니 배터리 잔량이 점점 줄어들었다. 점심을 먹고 배낭에 노트북과 작업할 자료들을 챙겨 무인카페로 갔다. 무인카페에 가니 한 사람만 앉아 있었다. 처음 가 본 무인카페의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를 뽑으려니 낯설기도 했다. 60대 후반, 할머니가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모습이라니, 젊은이 대열에 가까이 간 듯 느껴져 뿌듯하다.

오후 내내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혹시 전기가 일찍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6시쯤 집으로 갔다. 이미 어두워졌지만 집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캄캄해지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좀 더 환한 이른 아침시간에 시작해서 일찍 끝내면 좋을 텐데.’

그러다 작은 아들집이 떠올랐다. 아들은 일찍 출근하지만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들 둘을 챙겨서 등원시키려면 9시까지 마무리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그렇겠지. 오죽하면 저 시간에 정했겠나.’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집안 이곳저곳을 다녀야 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남편에게 집안에서라도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면서 조심조심 움직였다. 행여 넘어질까 서로 걱정해 주는 모습에서 은근한 동지애가 생겨났다. 이런 나이 듦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잠시 후 뒷동을 보니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뒷동은 전기가 들어왔어요!”

남편에게 소리치자 남편도 돌아보며 부러워했다.

‘우리도 곧 들어오겠지.’ 기대가 되었다.

마침내 우리 동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집안이 환해졌다.

“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냉장고를 열어보기도 했다. 반대로 앞동은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앞동 사람들도 우리를 부러워할 것이다.


이 밝은 세상이 어제보다 훨씬 환하게 느껴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또 다른 이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