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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Apr 16. 2023

소설의 힘

나는 어릴 때부터 소설을 사랑했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살면서 읽은 비문학 도서가 한 열 권은 되려나 싶을 정도로 독서 편식도 심했다. 그러니 책 자체를 좋아한다고 하기엔 부족한 열정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광팬으로서 소설의 힘은 단연 비문학을 압도한다고 말하고 싶다. 정보 전달이 위주인 자기 계발서나 비문학 도서는 글자 밖의 것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어차피 그게 책의 목적이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의 세상과 여러 인생이 담겨있는 소설에는 글자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다. 대신 독자가 보려고 하는 만큼만 보인다.


어릴 때는 소설의 능력을 인지하고 소설을 읽은 건 아니었다. 그저 소설이 재밌어서 읽었다. 어쩌면 소설의 제일 큰 목적은 재미일 수도 있겠다. 선의에서든 혹은 다른 무엇에서든 독자를 가르치겠다는 노골적인 태도가 가득한 자기 계발서는 반골 기질이 다분한 나에겐 어쩐지 뻔한 내용을 가지고 거드름 피운다고 느껴졌다. 정보 전달이 위주인 책은 정보 외의 것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만 찾게 됐다. 반면, 소설은 감상을 제한하지 않아 되려 풍부하게 느낄 수 있었고 다른 그 어떤 장르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그중에는 독자가 이해 가는 인물, 공감 가는 인물도 있지만, 이해되지 않는 인물과 공감 가지 않는 인물, 심지어 이해는 되지만 공감은 안 가는 인물, 이해는 안 되지만 깊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인물도 있다. 이런 인물들은 소설 속에서 독자가 경험하지 못하는 사건들을 경험하고,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 문제를 해결한다. 그 과정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독자는 세상이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고, 권선징악을 학습하며, 반사회적 교훈을 담지 않는 소설의 특성상 올바른 가치관을 반복적으로 쌓게 된다.




학창 시절 배운 ‘간접 경험’이 어떤 의미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체감한다. 누군가의 삶과 사정을 깊이 보여 주는 소설을 많이 읽다 보면 내가 누군가의 삶을 다 알지 못하며,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안의 사정은 제각각 다르다. 그리고 그걸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걸 일상적으로 적용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당연한 비판’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진정으로 당연한 것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작게는 친구들의 이해 가지 않는 행동부터 극단적으로 살인, 불륜까지도.


살인은 옳지 않다는 대전제는 피해 갈 수 없지만,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자기 방어로 저지른 살인은 쉽게 비난하지 못한다. 타인의 쾌락적 범죄와 자기 방어를 구분할 정도로 제3자가 많은 정보를 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만한 상황조차 나의 시각으로 누군가를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최근 인터넷에서 한 짤을 보게 됐다. 남편이 출산이 임박한 아내를 뒷좌석에 태우고 황급히 병원으로 향하는 영상이었다. 병원이 약 20km 이상 떨어져 있어 도중에 경찰과 119에 긴급 상황이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두 번 거절당하고 세 번째로 만난 순찰차가 병원까지 안내해 준 영상이었다.

자세한 상황을 떠나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위급 상황에서 도움을 준 경찰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느껴질 만한 영상이었지만, 의외로 댓글에선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개인이 경찰을 에스코트로 써도 되느냐, 애초에 왜 먼 병원을 선택했느냐, 그냥 구급차를 기다리지 왜 움직였느냐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정말 중요한 것일까? 개인의 사정은 천편일륜적으로 획일화할 수 없고, 모든 이들이 알아야 할 만한 내용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궁금증에 불과하다. 대댓글을 빌리자면 ‘남일이라고 쉽게 말한다.’라고 할 수 하지만, 우리는 이런 궁금증을 의견이나 비판을 가장해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듯 하다.


일상 속에서 습관적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쉬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멀리서 보면 비난하기 쉬운 상황이라도 함부로 결론 내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소설에 의한 간접 경험의 힘이다. 일반인은 경험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노출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통해서 독자는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고, 결과적으로 일상 속에서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 줄어든다. 아니, 이해 못 해도 괜찮아진다.

‘그건 내가 모르는 일이지.’

‘내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면 자잘하게 화가 나거나 서운한 일이 줄어든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간접 경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좋은 책 한 권을 진득하니 읽고 그 등장인물의 사정과 맥락을 이해하며, 다각도로 사건을 파악하는 독서법이 필요하다. 읽는 도중에는 마음껏 몰입하고 풍부하게 느끼되 판단은 마지막으로 미뤄야 한다. 나 역시 이런 전통적인 독서법을 선호하지만, 요즘 독서법을 좀 다르다는 걸 느낀다. 특히 연재되는 콘텐츠의 경우에는  긴 흐름을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한 회 한 회마다 단편적으로 인물과 사건을 판단하며, 그 단편적인 감정을 곧바로 댓글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댓글을 남긴 사람이나 읽은 독자들은 감상을 제한당하게 된다.


이런 독서법 역시 장점이 있겠고, 시대의 흐름일 수 있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런 방법으로는 간접 경험을 제대로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독서법은 쉽게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는 인물들을 통해 시야와 이해의 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시야 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끝나게 된다. 단편적으로 느껴진 감정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배출하고 끝나버리면 과연 다각도로 소설을 감상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토론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등장인물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등의 부정적인 감상을 매회 남기는 것은 결코 자신의 독서에도 타인의 독서에도 좋은 점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제하지 않고 모든 자잘한 생각을 내뱉는 사회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많이 읽음으로써 극단적이고 편협해지는 세상 속에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싫어하는 것, 이해되지 않은 것, 혐오를 줄여나가며, 인간관계나 인생의 갈림길에서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 걸 마음속 깊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세상 모든 게 불만이라 고민이라고 한다면 ‘소설을 읽어라’라고 말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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