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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별 릴리 Feb 15. 2023

아름답지 않은 모성애

엄마 됨의 시작

#엄마 #모성애 #시작



누구나 엄마가 있다. 엄마란 어떤 사람인가?


엄마에 대한 기억, 엄마를 떠올리면 수많은 생각이 든다. 엄마도 엄마가 아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 시절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엄마는 절대로 끊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줄을 매달고 살았다. 자식과 연결된 줄. 엄마가 되는 것은 선택할 수 있지만 일단 선택을 하면 그것은 죽는 날까지 이어진다.


만약 엄마 됨의 자격시험이 있다면 나는 자격 미달이었다. 진심으로 엄마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결혼을 망설인 이유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컸다. 나에게 결혼이라는 제도는 아이를 낳는 것까지가 기본값으로 세팅된 것이었다. '아이를 낳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내 인생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다.' 생각했기에 큰 부담이었고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결혼 전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나에게 남편은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이야기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지만 나중에 진심이 아니었음을, 결혼의 문턱을 넘기 위한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결혼을 하고 1년 정도 지난 후부터는 자신을 닮은 아이가 있었으면 했고 아빠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출국하기 전 시부모님과 통화를 할 때 어머님은 올해는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남편에게 전화를 넘겼다. 당황스러웠고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불편했다.


어머님의 기도의 힘일까?

나는 그해 7월 시력이 떨어져 라섹 재수술을 하고 친정에 가서 누워있었다. 눈이 예민해지니 생각도 예민해졌다. 늘 나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던 월경 주기가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떨림, 불안함과 함께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했다. 결과를 확인한 나는 화장실 안에서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엉엉 울었다.


한참이 지나고 밖으로 나오니, 남편은 걱정의 눈빛으로 감추려 했으나 절대 감춰지지 않는 기쁨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남들은 아이를 갖고 싶은데 안 생겨서 우는데.. 너는 아이가 생겨서 그렇게 우느냐고, 잘 되었다 생각하라고" 위로 아닌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병원에 가서 확인을 했더니 아기집은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임신이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는 길 위에 섰다. '딩크족을 꿈꾸는 20대 후반의 결혼한 여자 사람' 역할로 연극을 하고 있던 내게 뜬금없이 엄마라는 새로운 배역이 떨어졌다. 기다림 끝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기쁨에 가득 차서 주변에 알리고 축하를 받는 아주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내 인생에는 없었다.


초기라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여름휴가로 계획된 베트남 여행을 강행했다. 출발하기 며칠 전날부터 시작된 입덧은 로컬 냄새와 함께 생애 가장 고통스러운 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쌀국수도 먹지 못하고 오렌지 주스만 마시다가 돌아왔다. 여행을 가서 더 확실하게 느꼈다. 나는 다시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20대까지 과거의 나는 늘 최악을 생각하며 그 보다는 낫겠지, 괜찮겠지 하며 살았다. 아이를 낳고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와와 총성 없는 전쟁 같은 육아를 잠시 맛보았을 때쯤, '엄마 됨을 후회함'이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부터가 입 밖으로는 꺼내면 안 될 것 같은 금기의 문을 연 책이었다.


나는 엄마 됨을 숭고함으로 여기고 그것을 위대하다 말하는 이야기보다는 엄마 됨을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다. 그리고 최악을 상상하며 그보다 덜 힘들기를 바랐다.


아이를 낳고 처음 든 생각은 '신기하다, 예쁘다, 조심스럽다, 돌봐주어야 한다'였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육아는 책임감을 갖고 해야만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공부를 하면 낫겠지란 믿음 아래 더 효율적인 방법, 육아의 정석을 찾으며 밤마다 책과 유튜브를 헤맸다.


모유 수유를 잘 해내고 싶었고 수면 교육도 제대로 해서 여유 있고 우아하게 내 삶도 살며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예민한 아이를 키우며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고 자부했던 나는 작은 생명 앞에 무기력해졌고 그 마음을 좀처럼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지쳐갔고 때때로 포기하고 싶어졌다.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에 대한 미움과 함께 육아 우울증이 찾아오려 할 때쯤, 나는 도망치듯 친정으로 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2달이 안 된 어느 날이었다.


친정 엄마가 있음에도 예민한 아이는 결코 쉽지 않았다. 자식을 셋이나 키우신 우리 엄마도 절절 메셨다. 그렇게 그곳에서 며칠만 있으려고 했던 나는 200일이 될 때까지 눌러 앉아버렸다. 맛있는 밥도 먹고 산후조리도 할 수 있었다. 육아를 하다가 한 번씩 폭발했고 이따금 '무슨 엄마가 그러냐'라는 엄마의 질타를 듣기도 했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서는 내가 육아를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서둘러 직장으로 복귀했다. 그건 나름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시어머님의 도움을 받았고, 11개월이 될 때쯤부터 어린이집을 보냈다. 직장에 나가면서 살 것 같았다. 과거에 힘들게만 느껴지던 일들이 육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아이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막상 아이와 함께하면 힘들었다. 물론 꼬물꼬물 움직이는 날 닮은 사랑스러운 아이와의 시간들이 기쁨이 되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잠깐 잠깐일뿐 그 이외의 힘든 것이 더 많았다.


이때까지 나의 모성애는 뭉쳐지지 않은 흩날리는 눈발 같았다. 있긴 하지만 금세 녹아버려 눈으로 느끼기에는 애매한 상태. 엄마는 이래야 한다는 사회 통념과는 맞지 않았다. 나는 당장 내가 힘든 것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때때로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아이를 향한 내 마음의 빈자리는 늘 남편이 채웠다. 남편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아이를 돌봤다. 아이와 눈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아기 띠를 매고 산책을 하고 투박했지만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봤다. 그런 남편은 보며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덜 수 있었다.




2020년 6월. 여전히 육아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어린이집 원장님은 감정코칭을 배워볼 것을 권하셨다. 그때부터 치열하게 책을 읽고 아이에 대해 생각하며 두 달간 감정코칭을 배웠다. 나는 아이를 보며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마음이 충족되지 않아 늘 짜증과 속상함이 가득했던 나. 그걸 알아주길 바랐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서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늘 속으로 끙끙 앓기만 했던 나. 내 아이도 그랬겠구나. 그래서 그렇게 표현했겠구나.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바라보니 아이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어린 시절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을 아이에게 주려고 노력했다. 말처럼 쉽지 않았다. 순간순간 초감정이 올라와서 아이가 울음을 보이면 화가 나기도 하고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해준다는 마음으로 더 너그러워지려 더 따뜻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이 자연스러워질 때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마음을 알아주니 더 이상 심하게 떼를 쓰거나 징징거리지 않았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던 엄마에서 따뜻하고 믿을 수 있는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느낄 때쯤, 어린이집 원장님으로부터 우리 아이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이는 정서적으로 점차 안정되어 갔다. 아이와 애착이 형성되니 그제야 비로소 모성애라고 부를 수 있는 마음이 나에게도 생긴 것을 느꼈다.



모성애가 부족한 엄마의 삶을 살면서 수없이 후회했고 괴로웠고 좌절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나에게 모성애는 곧 희생처럼 느껴졌다. 나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찰흙을 조금씩 떼어 내어서 아이에게 주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성애는 아이가 뱃속에 생기는 순간, 또는 아이가 태어난 순간 생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믿는 숭고하고 위대한 모성애는 여전히 나와는 거리가 느껴진다. 그보다는 모든 인간관계가 시간의 흐름 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다 어느 순간 깊어진 것을 느끼는 것처럼, 추억을 공유하면 가까워지는 것처럼, 오래 보면 정이 드는 것처럼 아이에 대한 마음도 그렇겠지 하고 생각한다.



지금 누군가 '아이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느냐'라고 묻는다면 가끔 나보다 더 사랑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라고 답할 것 같다. 엄마 됨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아이의 소중함과는 별개로 '가끔'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여전히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우선순위를 무조건 바꾸는 객체의 삶은 살고 싶지 않다. 아이와 함께하며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깊어지며 성장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 아이를 얼마큼 사랑하냐는 말보다는 아이와 함께 해서 내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 찰흙을 허물어 아이를 빗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깨끗한 찰흙을 하나 쥐여 주고 아이가 인생을 빗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끔 내가 가진 찰흙을 떼어주기도 하고, 아이가 가진 찰흙을 받기도 하며 서로가 만들어가는 삶의 모습을 응원할 것이다. 희생보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기꺼이 할 것이다. 우아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오늘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잠든다. 내가 아이의 위로가 되고, 때로는 아이가 나의 위로가 되는 그 시간은 온전히 평안하다. 나의 모성애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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