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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별 릴리 Jan 23. 2023

평등한 명절을 꿈꿉니다.

저는 가족 모두가 천주교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제사를 지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차례를 지내는 대신, 명절 당일 아침에 온 가족이 미사를 하러 갔습니다. 저에게 설날은 어른들께 새해 인사를 하고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날이었습니다. 명절은 곧 긴 휴일이었고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안하게 뒹굴뒹굴 쉴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해가 시작할 때 달력을 살펴보며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기 전 마음에 걸렸던 것이 명절과 제사였습니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제사를 해야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또 문화와 관습에 따라 명절에 미리 시댁에 가서 음식을 하고 차례를 지내고 명절 당일 뒤늦게 친정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저에게는 결혼을 고민할 정도의 중요한 문제로 느껴졌기에 실례가 될 수 있음에도 결혼 직전 남편을 통해 어머님께 여쭤봤습니다.



1년에 명절이 2번이니 설날에 시댁을 먼저 갔다면 추석에는 친정을 먼저 가도 되는지를 미리 허락을 구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흔쾌히 그래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 음식도 전을 부치지 않고 시장에서 구입하신다고, 어머님 손에서 제사를 정리하시고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저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명절 전날 시댁에 가면 어머님은 항상 음식을 다 해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준비된 음식들을 보며 명절 음식은 전을 부치는 것이 다가 아님을, 음식의 가짓수를 채워가며 하나하나 준비하고 상차림을 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님은 제사를 지내고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30년이 넘게 그 책임을 다 하셨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아주 미미한 도움을 보탰을 뿐. 어머님의 고단한 손이 가족들의 편안하고 즐거운 명절을 빚어냈습니다.



결혼 후 2년까지는 명절에 시댁-친정, 친정-시댁을 번갈아가며 갔습니다. 하지만 계속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이 제사를 지내시는데 남편이 참석을 안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한 두 번 마음이 편하고자 시댁을 먼저 가게 되었고 점점 시댁을 먼저 가는 것이 당연해지는 듯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제가 꿈꾸는 평등한 명절은 어렵겠구나 싶었습니다.

명절 당일 아무리 빨리 출발해도 4시가 넘어서 친정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엄마를 생각하며 밀리는 차 안에서 가끔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작년 추석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어머님께서 더 이상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30년 넘게 지내던 제사를 어머님은 그렇게 정리하셨습니다. 앞으로 제사는 아버님이 성묘를 가셨을 때 그곳에서 아버님의 형제분들과 간소하게 지내기로 하셨습니다. 어머님과 아버님께서는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고자 어려운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맞는 명절입니다. 이번 설에는 어머님, 아버님, 아가씨를 저희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니 모임 장소가 훨씬 자유로워졌습니다. 명절 당일, 어머님이 끓여주시는 정성가득한 떡국을 먹었습니다. 저녁에는 소래포구에서 방어 회를 포장해와서 술 한잔 곁들이며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어머님께서는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저는 음식을 차리고 뒷정리를 맡아서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담이가 어지른 우리 집 거실을 정리해주시고 쓰레기를 비우셨습니다. 아가씨는 우리 담이를 사랑으로 보살펴주었니다. 남편은 아버님이 불편해하시던 핸드폰을 바꿔드리고 사용하시기 편하게 세팅을 해 드리고,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왔습니다.



각자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니 어느 누구도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습니다. 편안하고 즐겁게, 평범한 듯 특별하게 2박 3일이 흘러갔습니다. 명절 당일 어머님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너무 편안하시다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며느리인 저도 이번 명절은 더욱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조금 더 자유롭고 평등한 명절을 꿈꿉니다. 누구 하나의 희생으로, 또 누군가는 불편함을 견뎌야만하는 명절은 과거에도 불편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려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더 답답했습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현실과 삐걱대는 전통과 관습 아래 행복해야 하는 명절이 누군가에게 반갑지 않은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너 결혼 잘했다. 그런 시어머님, 시아버지 없어."

"복받은 거야. 부럽다~~"


저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게 하겠지요. 진심으로 감사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더이상 이런 말을 듣지 않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 없이 평등하고 편안한 명절이 되기를, 친정에 먼저 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고 딸을 가진 부모님도 명절날 아침 딸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명절도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합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는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우리만의 새로운 명절 문화를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어머님, 아버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해주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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