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by MSG윤결

멈춰버린 기억의 문을 열며


살아온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억은 늘 그 자리에 불쑥불쑥 찾아오지만 내 마음과 그걸 끄집어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문장으로 길어 올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순간, 나는 다시 그 차가웠던 그곳, 그곳에, 다시 서게 될 것 같았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허기진 그때의 그시절 그계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두려웠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을까요? 왜 그렇게 살았니, 도망가지 않고 왜 그렇게 버텼니?라는

타인의 질문에는 적당한 미소로 얼버무렸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앞에서는 눈을 감았죠.

엄청 큰 각오로 내일을 다짐하기보다, 그저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기자'는 마음으로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을겁니다. 그래야 나에게 내일이 올테니까요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 그리고 눈치

어릴 때의 기억은 다 기억나지 않아요. 띄엄띄엄 끊겨 있죠.

하지만 이상하게 사라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어요.

쾅하고 닫히던 문소리, 멀어지는 뒷모습, 잠깐 잡았다가 놓쳐버린 손바닥의 느낌 같은 것들요.

그게 뭔지 설명할 순 없는데, 시간이 지나도 자꾸 그때로 나를 끌고 가더라고요


사랑받는 법보다 눈치 보는 법을 먼저 배우면 참 힘든 일이 많아요. 울면 안 되는 상황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래서 아프지만 아프다는 말을 입안으로 꿀꺽 삼키는 게 버릇이 됐어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만히 있어야 안전했으니까요. 그렇게 나는 표정 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진다는 것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부서지고 깎여나갔는데도 삶은 계속되더라구요.

완전히 마음이 무너지고 깨지는날들이었고, 수없이 무너졌고, 자주 길을 잃었고,

때로는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있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넘어지더라도 조금 더 느리게, 남들보다 늦어지면 그저 그 자리에 앉아있었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안에서 아주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한 번 더 살아볼까.”


아주 조심스럽게 품게 된 그 작은 불씨 하나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이제야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축복받지 못한 시작과,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해야 했던 시간들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있는 그대로 살아온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기까지 참 오래 걸렸습니다.

기억은 늘 머릿속에 있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거든요.

말을 뱉는 순간, 다시 그 자리에 서게 될 것 같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묻지 않아도 스스로에게조차 답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버티며 살았습니다.



이제, 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제 사람들은 나를 이름으로 칭해줍니다.

' 야, 너, 아무개야, 불쌍한 년, 어미아비도 없는 년' 이런 욕이 섞인 말보다 이름으로 불러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나의 이름이 이토록 소중하고 귀한 줄 몰랐습니다.

그저 욕설과 섞인 이름으로만 불리다 보니 내 인생이 참으로 서글펐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멈췄던 시간들이 비로소 문장이 되어

어딘가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생도, 나의 삶도, 멈추었던 시간들처럼 어딘가로 흘러가게 될까요?


난 꼭 행복하고 싶습니다. 보란 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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