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콘텐츠
나는 GL을 좋아한다. 학원물, 오피스물, 판타지……. 다양한 장르의 GL을 즐겨보는 나지만, 그중에서 특별히 선호하는 장르가 있다면 중년 여성이 등장하는 GL이다.
왜 하필 중년 여성이냐고? 그야 중년 여성이 가지고 있는 관록이 풍부하기 때문이 아닐까. 젊은 여성보다 더 많은 날을 살아왔기 때문에 캐릭터의 서사가 더 풍부한 경우가 많다. 중년 여성 이야기에서는 다양한 삶을 살아온 여성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여성이 여럿 등장해서 사랑을 나누는 콘텐츠라니.
오늘은 중년 여성을 좋아하는 사람부터 중년에 관심 없었던 사람까지 모두 사로잡는 중년 여성 GL 콘텐츠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1) 윤희에게
이 영화가 나왔을 때를 기억한다. 당시 나는 배우 김희애를 좋아했다. 그가 찍었던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돌려보고 또 돌려보던 어느 날, 나를 비롯한 김희애 팬들은 그가 찍었다는 새로운 영화 소식에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이혼한 뒤 딸 새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윤희가 첫사랑인 쥰을 만나러 홋카이도로 떠나는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가 첫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새봄이가 윤희를 홋카이도로 데려갔다. 윤희와 쥰이 재회할 수 있도록 엄마 몰래 이런저런 계획을 짜는 새봄이도 귀엽고, 윤희와 새봄이가 여행하는 동안 스크린에 비춰지는 설경도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윤희와 쥰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들이다. 서로에게 보낸 편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재회했을 때의 그 눈빛…….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아해서 아홉 번이나 다시 본 영화다. 음악도 아름답고, 분위기도 잔잔해서 중년 여성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도 보기 좋은 영화다. 눈이 오는 어느 겨울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이 영화를 함께 관람하면 어떨까.
2) 허스토리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재판부에 맞선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영화는 아니지만,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허스토리안’이라 칭하면서 n차 관람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중년 여성들, 노년 여성들이 많이 등장하고 그들의 서사 하나하나를 조명한 영화는 맞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GL로 분류해도 될까?
이에 대한 내 답은 이렇다. 못할 건 뭔가? 독립운동 등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에서 러브라인이 등장하는 건 흔한 일인데 여성 간 동성애가 배제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이 영화는 직접적이고 선명한 GL 복선을 제공한다. 스포일러 상의 문제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문정숙과 신사장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해지게 될 것이다.
3) 담쟁이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화제작이었던 영화. 과거 예원의 선생님이었던 은수와 그의 학생이었던 예원이 교제하며 동거하고 있는 가운데, 은수는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현실의 벽을 직감한 은수는 예원에게 이별을 고하지만, 예원은 그런 은수의 곁을 지킨다.
예원, 은수, 수민 세 사람의 가족이 겪어야 하는 현실의 벽과 아름다운 사랑을 다룬 영화가 바로〈담쟁이〉.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에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이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평을 줄 필요가 있는 영화인가 싶었다.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를 담은 영화였으니까.
물론 아주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굳이 이런 장면이 필요했나 싶은 정도의 결말이 생각난다. 하지만 우미화 배우의 아름다운 얼굴…… 그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며, 대한민국 내 중년 여성과 청년 여성 GL이 매우 드문 것을 생각하면 한 번쯤 봐도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4)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봄툰에서 연재 중에 있는 19금 GL 웹툰. 빚쟁이에 시달리던 중년 여성이 이웃집 의대생 집에 숨어 살기 시작하며 생기는 일들을 다룬 만화다.
GL 웹툰이 귀한데 그 중에서도 중년의 유부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GL 웹툰은 더 귀하다. 게다가 중년 여성의 상대역은 의대생인 도연. 발칙한 주인공 아주머니 진주와 건실한 대학생이 남모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자극적인 설정이 이 웹툰의 매력인 듯하다.
안 그래도 사람들이 GL을 선호하지 않아서 작품이 많이 없는 가운데 더 소수였던 중년 여성 GL. 그래서 처음에 이 작품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특히 웹툰에서 중년 여성이 등장할 경우 어설픈 페미니즘을 프로파간다처럼 사용해서 만화가 지루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만화는 여성을 욕망하는 여성의 욕망을 적절하게 잘 드러낸다. 가장 자극적이었던 장면은 진주가 도연의 동생을 만났을 때. 대체 어떤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러냐고? 직접 읽어 보면 왜 자극적인지 알 것이다.
5) 숨
큐큐퀴어단편선 〈언니밖에 없네〉에 실려 있는 천희란 작가의 단편. 여성을 좋아하는 70대 정희가 60대 해옥이와 함께 아파트 청소 일을 하면서 겪는 일을 담은 소설이다. 흔히 퀴어나 GL을 생각하면 많이들 젊은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런 편견이 부서질 수 있도록 노년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소설의 매력은 단언 노년 레즈비언의 삶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작가가 쓴 소설인데도 나이 있는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묘사했으므로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풍부한 이야기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일리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