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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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理想). 나에게 이상이란 줄곧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개념이었다. 나 자신을 향하지 않는 이상은 그 쓰임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언제나 완성된 형태의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딘가 정체된 자신의 모습을 유독 견디지 못하는 사람. 모든 방면에서의 완벽함을 강박적으로 좇는 사람. 어릴 적엔 이상하리만큼 성장에 집착하는 스스로를 그저 대견하게 여길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의 부족함에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상은 결핍과 맞닿아 있다.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건 결핍의 반어적 표현이다. 그러니 이상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건 자신의 무수한 결핍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실로 험난하지 않은가? 애써 못 본 체하던 나의 못난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직면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건강하게” 이상을 좇으려면 나의 결핍을 마주할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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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건강하게 이상을 좇아야 한다. 이것이 오랜 시간 이상을 갈망하느라 허덕인 내가 마침내 내린 결론이다. 한때는 이상을 벼랑 끝에서나 자라는 전설 속의 꽃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불변하는 유일무이한 가치로 삼고, 이에 도달하는 순간만을 성취라고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는 당연히 감내해야만 하는 몫이 된다. 나의 결핍은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지기만 할 뿐 채워지지는 않는 것 같다며 불안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건강한 이상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이후로 깨달은 점이 있다. 이상은 그 자체로 목적지가 아닌, 방향성이 되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점이다. 이상적인 자아에 명중하지 못할지라도 나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달을 향해 쏴라, 빗나가도 별이 될 테니.’라는 명언을 좋아한다. 목표를 크게 잡으라는 일반적인 해석도 마음에 들지만, 달이라는 이상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무수히 많은 별의 반짝임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 같기도 해서다.
어쩌면 이상이란 우리의 생각보다 덜 숭고하고 더 자잘한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자갈 해변에서 마음에 드는 조약돌 하나를 주워 간직하는 행위 정도로 말이다.
그대가 주워 든 돌 하나를 당시 그대가 바라던 이상적인 자아라 쳐 보자. 이때 주운 돌을 버리거나 다른 돌과 바꿔치기하는 변덕 정도는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이상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는 내가 건강한 방식으로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과거의 나는 항상 이상적인 무언가에 대해 ‘변함없음’이라는 가치를 기대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변함없는 내 모습-성격, 습관, 취향 등-에는 안도하는 반면 변화를 마주할 때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듯한 불안감에 휩싸이곤 하였다.
이제는 전처럼 그러지 않는다. 그저 발끝을 시작으로 펼쳐진 수많은 조약돌을 하나하나 줍는 어린아이처럼 이상적인 자아를 좇는다. 여기서 핵심은 ‘어린아이처럼’이다. 어린아이에게 이상은 하나가 아니다. 아이는 탐심을 절제하지도 않는다. 주워 담은 돌멩이가 한 움큼이나 된다는 말이다.
신중하게 큰 거 하나만 담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끔 주머니 속에서 저들끼리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그만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상 보기를 돌같이 하자는 이야기이다. 조약돌에 비유하는 순간 이상은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닌, 간직해야 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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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돌멩이들을 전면 교체한 사건이 있었다. 2년 전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메일 답장이 그 시작이었다. 교수님께서는 많은 조언을 주시던 와중 내게 한 가지 숙제를 내주셨다.
OO이는 어떻게 살고 싶니? 어떤 하루로 인생을 채우고 싶니? 교수님의 물음에 나는 자신 있게 주머니 속 돌멩이 하나를 골라 메일에 실어 보냈다.
- 지금의 저는요,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타고나길 비관적인 성격에 가까운 내게는 긍정을 체화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에 가까운 목표였다. 이상적인 나의 모습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잘 사는 인생이 되지 않겠냐며, 스스로가 내민 모범 답안에 취해 있을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님의 답장이 도착하였다.
- 숙제... 땡..
OO이가 말한 영위하고 싶은 인생에는 “타인”이 없잖아. 타인 없이 OO이가 인생을 영위할 수 있을까? 그리고 타인과 상관없이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정의할 수 있을까?
교수님의 답장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내 주머니 속 자갈에는 ‘나’를 향한 이상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인이라는 글자를 마주하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지배적인 감정이 거부감이었음은, 내게 연이은 충격이 되어 돌아왔다. 도대체 내가 느낀 거북함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에서야 짐작하건대 나는 나의 유약함이 선명해서 무서웠던 것 같다. 타인의 조그만 개입만으로도 열심히 빚어 온 자아가 쉽게 부서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두렵다. 자신의 유약함과 함께 가시화된 고민들은 그 출발점은 다를지언정 끝내 한 가지 바람으로 귀결된다 - 아아, 더욱 단단해지고 싶어라.
어떻게 해야 더욱 단단한 내가 될까, 라는 오랜 고민은 결국 어떤 이상점을 설정하면 좋을까로 이어졌다. 덕분에 지금껏 놓치고 있던 중요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건강한 이상을 좇고자 한다면,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이상이 자신에게만 국한되어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내가 간직하던 모든 이상의 주어는 ‘나’에서 나의 ‘세계’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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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쥐고 있는 돌멩이들은 전부 나의 세계를 사랑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계라는 표현이 누군가에겐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나라는 존재를 확장하여 정의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여전히 미숙하고 조금 부끄럽다. 아직까지는 ‘나의 세계’에서 ‘세계’가 아닌 ‘나’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나로서만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을 이상으로 두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니 교수님께 다시금 메일을 보내 볼까. 이제는 나를 긍정하는 사람이 아닌, 내 세계를 긍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살아가면서 스치고 맞닿는 소중한 타인들과 기꺼이 함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두 발로 딛고 있는 이 시공간을 오래 추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까지도 나의 이야기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앞으로도 나의 ‘되고 싶다’는 끊임없이 확장 중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나의 세계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것이 부단히 달그락대는 나의 이상이다.
달여섯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