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출근한 집에서 대학 졸업생이자 대학원 준비생, 정규직 직장이 없는 아르바이트생이 하루를 시작한다.
엉금엉금 침대에서 기어 나와 거실로 나간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듯하다. 부모님과 오빠의 방 침대의 이불은 기상 직후의 모습 그대로 구겨져 있다.
10년 전의 나는 그냥 보고도 지나가겠지만, 요즘은 아니다. 어느새 침대에 다가가 그 이불들을 몇 번씩 털고 각을 맞추어 개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밤마다의 습관도 하나 생겼다. 마무리가 안 된 설거지를 모두 치우고, 엄마가 일어나자마자 식사 준비하기 좋게끔 밥통을 씻어놓는 것이다. 벌써 6개월 가까이 매일 하고 있다.
이전보다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 된 걸까? 물론 엄마가 다음 날 아침에 편할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긴 하다. 그러나 배려는 일종의 이기심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이 집에 있을 이유를 만드는 행위를 하는 것 같다.
일찍이 독립하지 못하고 소위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지 않으면서 부모님의 집에 살아가는 건 흔한 풍경이 됐지만 그렇다고 마음 편한 일은 여전히 아니다. 그래서인가, 자꾸만 집안일에 눈이 간다. 집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걸 느끼는 것이다.
불과 올해 여름, 대학교 4학년의 마지막 학기까지는 이러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계약직 직장인이자 주부인 어머니가 집안일을 주로 하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가족들은 여유가 되는대로 집안일을 조금씩 거들뿐이었다.
나는 요리를 안 좋아하기도 하고 빨래 같은 집안일은 하기 싫어서 일부러 밖에서 밥을 사 먹고 학교에 더 오래 머무르기도 했다. ‘얌체’적 태도를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양심의 가책은 거의 느끼지 않았다.
본가에서 통학하며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충당했다. 부모님께 한 달에 몇십 만원씩 용돈을 받지 않는 대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사실 알바를 할 수 있는 지역에 사는 것, 내 용돈만 벌어도 되는 삶이 얼마나 특권인지 새삼 느끼기는 하지만. 어쨌든 ‘대학생’이라는 울타리, 신분을 설명해주는 저 든든한 세 글자가 있어서 행복했다.
유시민 작가의 이 말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 “대학생은 독립을 준비하는 시기”라는 것.
대학교 2학년쯤인가, 유시민 작가의 저 말을 보고서는 졸업하자마자 본가를 떠나기를 꿈꿨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찍이 남들처럼 자격증을 준비하고, 스펙을 쌓고 열심히 인턴을 지원해서 경력을 쌓아 돈을 벌 사람이 될 준비를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몹시도 알 수 없는 것인지라. 과를 바꾸는 등 진로에 대한 여러 고민이 있었고 나는 더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대학원 발표가 나고, 2월의 등록 기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실 여전히 이게 맞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가장 고민되는 건 이것이다.
-빨리 돈을 벌어야 하지 않을까.
이 불안은 부모님을 위해서가 아니다. 집안일을 하기 싫어서도 아니다. 오직 나를 위해서다. 지금 본가를 청소하는 게 우선이 아니다.
본가는 어디까지나 부모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꾸리고 이뤄낸 보금자리이지, 자식은 여기에 보탠 게 없다.
이건 내가 종종 잊곤 하는, 어쩌면 본가의 편안함에 젖어 '잊고 싶어하는' 진실이다.
본가라는 곳은 나의 본(本), 뿌리가 시작된 곳, 부모가 마련해 주고 자식을 키워낸 공간이다. 그러나 뿌리는 땅 안에 있다. 보이지 않는다. 내 생각에 인간은 뿌리채소보다는 나무다. 우리가 나무에 대해서 아는 것은 대체로 줄기부터다.
인간은 자신을 세상을 보여주지 않고서는, 결코 성장했다고 할 수 없는 생물이다. 다시 말해 뿌리에만 멈춰있다면 나는 사회적으로, 가시적으로 내 인생을 뻗어나간 게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는 캥거루족의 ‘캥거루’ 비유는 (첫 글에서는 아니라고 했지만) 적절하다. 캥거루 주머니는 어미 캥거루에게 있다. 내가 그걸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 어미 캥거루의주머니를 자기 것인 양 그걸 관리하고 씻고 뜯어내려고 하면, 그야말로 정신 나간 새끼 캥거루가 아닌가!
물론 같이 살아가는 동거인으로써, 주부를 도와 집안일의 무한한 부담을 줄여주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본가는 본가의 주인이 관리하는 게 근본이다.
아침에 가족들 설거지를 치우며, 가끔 불현듯 무서워진다.
이렇게 설거지를 하며 느끼는 뿌듯함을, 나의 진정한 사회적 성취와 혼동하는 거 아닌가? 이 뿌듯함에 안주하며 진정 내 인생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발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번개처럼 나를 스칠 때면 얼른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얼른 하던 집안일을 해치우고, 때로는 하던 것도 그만두고서는 도서관이든 카페든 ‘나’를 직시할 곳으로 떠난다.
관성을 벗어나려면 언제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일으켜야 한다. 본가라는 강한 안락함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오늘도 명심하고 명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