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덕꾸러기 의미를 찾아보니 "남에게 언제나 천대를 받는 사람이나 물건"이고, 예문으로 "그렇게 예뻐하던 개도 늙고 병드니까 금세 천덕꾸러기가 되고 마는 거 봐라"이다.
퇴직 후 집에 있으니 소품을 어디로 옮겨둔다거나 산책을 나가는 시간을 맞춘다거나 하는 소소한 일에서 그냥 놔둬! 혹은 이렇게 하자!라고 일방적으로 의견을 무시당하는 순간이 있다. 섭섭한 마음과 홀대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천덕꾸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적절한 표현이 되는지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다. 당연히 딱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예문을 보면서 둔기로 한방 맞는 기분이다. 위의 "그렇게 예뻐하던......" 예문이 그대로 읽히지 않고, 문장 앞부분이 제 처지로 탈바꿈되어 '퇴직하니 금세 천덕꾸러기가 되었다'는 문장으로 보이는 것이다. '퇴직 후 집에 있으면서 겪는 무시나, 홀대'가 개콘의 우스갯소리겠지 생각했었는데, 실제 그런다고 느끼니 한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생각에 자꾸 빠져드는 게 얼마 전 브런치 작가 합격통지를 받았을 때부터인 거 같다.
학창 시절부터 감정을 말보다는 글로 남기기를 좋아했었다. 회사 다니면서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이런저런 생각과 감동적인 순간을 글로 남기고 있었다. 가끔 그럴싸한 표현이 만들어지고 나면 아내에게 자랑도 하고 가끔 평을 받아보기도 해서 아내도 나의 이런 모습을 좋아했다. 퇴직으로 자유의 시간이 찾아오자 저는 글 쓰는 재능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고, 제2의 인생에서는 글 쓰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박민하작가의 글쓰기 프로그램을 한두 개 참가하여 글쓰기를 배우면서 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네이버 브런치 스토리 작가에 도전하는 권유를 받고 배운 기술을 총동원해서 작가 신청서를 작성하고, 예비글 세편을 올렸더니 두 번만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글에 대한 오랜 시간 관심 끝에 이뤄낸 것이라 작지만 그 감회는 이루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본가 가족과 지인들께 자랑질 한참 하고 나니 아내가 교구 일을 마치고 집에 왔다. 잠시 맞이하는 인사를 나누고 작가에 합격했다고 얘기했더니 아내는 피곤하니까 나중에 얘기하잔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은 말짱 거짓이다. 그 누구보다도 지금껏 나의 모습을 지켜봐 온 사람이었기에 내 기분을 잘 알고 함께 기뻐해줄 거라 기대했는데, 무관심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안겨주었다.
이후로 나는 이 사람이 나를 아는가? 나를 반려자로 생각하는가? 이런 의구심을 갖게 된 거 같다. 그래서 지금은 전혀 감정이 실릴 수 없는 즉, 무의식적인 반사행동에서도 섭섭할 거리를 찾아내고 있는 거 같다. 그래서 천덕꾸러기로 여긴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많아진 것이다.
걷잡을 수 없게 번지는 배신감을 느끼다가 예전에 읽었던 "내 감정을 읽는 시간" 이란 책에서 이 같은 '배신감'에 대해 다룬 내용이 있었던 거 같아서 블로그를 뒤져 이런 내용의 독후감을 찾아냈다.
"배신감은 상대에 대한 믿음이 먼저 있었고, 나는 상대에게 충실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이 기대와 사랑, 믿음과 의리를 저버린 행동을 할 때 느끼는 상처다. 애초의 나의 기대, 믿음, 사랑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믿음은 상대를 잘 알아서 생긴 다기보다는 내가 믿고 싶은 대상에게 일으키는 내 마음이다. 즉, 상대에 대한 내 욕구와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 우리는 배신을 느낀다.
배신감의 쓴맛을 겪지 않으려면 어느 누구도 믿지 말아야 할까요? 아마도 균형감 있는 알아차림이 도움이 되겠지요.
내게 A라는 기대가 있어서 그를 믿고, 좋아하고, 따르고 있구나. 하지만 그에게는 B라는 기대가 있고, A와 B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어. 간단히 맞교환할 수 있는 일이 아닐 수 있지!라는 마음의 여지를 늘 준비해 두는 것이다."
좋은 해결책인 거 같다. 브런치 작가가 된 기쁨에 나의 기대감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고, 아내는 피곤한 하루 일상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서 쉬고자 하는 마음이 한껏 고조되어 있었을 뿐인데 천덕꾸러기니 섭섭하니 하는 마음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게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메모를 남겼던걸 찾아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끝없이 번지는 삐뚤어진 마음을 빨리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건 누가 충고하거나 해명하여 반항심이 일게 하지 않고, 스스로 찾아낸 해답이었기 때문인 거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꼬리물기가 발동했는지 오은영박사님의 "화해"라는 책에서 다룬 '생각'과 '감정'에 대한 내용도 떠올라서 찾아봤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 감정을 말하면 이것을 그 사람의 생각이라고 봅니다. 그냥 그런 감정이 들었다고 말한 것을, 의도를 가지고 한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지요. 감정을 생각으로 받으면, 아이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과 그 생각의 옳고 그름을 따지게 돼요. 쓸데 있는 것인지 쓸데없는 것인지 나누게 됩니다. 그러고는 그 생각을 고쳐주려고 설명을 하고 설득하려고 듭니다. 설득이 잘 안 되면 약간 화까지 내면서 감정을 고치라고 강요하죠. 이런 식이면 다음에도 자기감정을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그렇지 않은 거보다 만 배는 나은 거예요. 참 어렵긴 하지만 아이의 말과 행동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감정을 표현하면 감정으로 받아주세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옳거니 이거구나! 아까 생각한 거보다 이게 훨씬 상황에 맞는 심리해석 같다. "감정을 표현하면 감정으로 받아주라"는 얘기를 또렷이 뇌리에 새기고 나니 천덕꾸러기 취급한다는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히려 '피곤해서 집에 와 쉬려는 아내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었구나!' 하는 생각에 미안함이 생겼다.
내가 이렇게 변화무쌍한 갈대 같은 사람인지? 내 생각이 책과 세월의 바람결에 쓸려 굴러가며 갈고 닦이는 것인지? "다정한 것들이 살아남는다"는 것처럼 스스로 자기 합리화를 통해 섭섭함을 멈추는 것인지? 모르지만 오늘 하루 많은 생각이 뭉텅이로 쏟아지고 마음은 성장하고 가슴 저림이 치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