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고 있는가
비영리단체에서 일한다는 건 ‘신기루’와도 같다.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고, 이룬 것 같은데 막상 이룬 게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신기루는 빛이 물질의 경계면에서 꺾이거나 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한다. 뜨거운 공기와 차가운 공기의 밀도 차이가 빛의 굴절을 만드는 것이다.
스무 살 때 우연히 국제인권과 평화, 난민(Refugee) 분야 및 공익법 단체 자원활동을 시작으로 비영리 영역에 발을 내딛었다. 본격적인 사회생활은 기자로 시작했지만, 이후 일을 그만둔 뒤 비영리 영역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다. 비영리단체에서 일한다는 것. 나의 일은 무엇이 뜨거웠고 무엇이 차가워진 걸까.
시작은 뜨거웠다. 퇴근길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 역사에서 “우리나라에도 난민이 있어요”라는 문구가 적힌 전단지를 돌릴 때였다. 당시만 해도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우려할 수 있는 난민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굶주린 기아 난민 말고, 정치적 난민도 있다는 걸 알리는 캠페인에 거리낌없이 나섰다.
아프리카계 ‘예비 난민’ A는 웃음이 환했다. 웃음의 순도가 높았다.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을 다친 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케이, 오케이”라며 연신 괜찮다고 말하면, 진짜 괜찮은 것 같았다. 자국의 정치적 상황을 말할 때만 눈빛이 매서워졌다. A는 캠페인에 일손을 보탠다면서 넥타이까지 갖춘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어색한 한국말로 “여기요” 하며 전단지를 나눠줬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도 열심히 뿌렸다. 그러던 중 전단지를 뿌리친 채 바삐 걸음을 옮기던 행인이 다시 돌아왔다. 냉큼 전단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건 A를 손가락질하며 “난민이라면서 왜 저렇게 웃으면서 나눠줘요?”라는 물음이었다.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왜 똑같은 사람인데 처지가 이렇게 다를 수 있지?’라는 질문만 남았다. 지금이야 누군가의 처지를 한 장면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만 해도 불순물 없던 질문이 청춘을 이끌었다.
젊은 시절 내내 겉으로는 비혼주의자였다. 비혼주의가 절실했다기보다 연애는 했지만 결혼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결혼하고 난 뒤의 삶은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한 나날이 막막해서 ‘비혼주의’를 표방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여러모로 설명하기 효율적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다녔던 비영리단체에서 만난 활동가 대부분은 미혼이었다. 기혼자여도 아이는 없었다. 육아하는 활동가를 만나본 건 단 두 명뿐이다.
어쩌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나의 일자리는 미래가 없다’라는 현실에 자꾸만 기가 죽었다. 혼자일 때 견딜 만했던 현실이 셋이 되니 달리 보였다. 대기업 초년생 연봉이 4,800만 원(2025년 기준)이라고 한다. 평균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지만, 내 인생에서 지난 10여 년간 연봉 4,000만 원(세전)을 넘어본 적이 없다. 이 사실을 견주어 보면 막막함은 더욱 짙어진다. 비혼일 땐 몰랐던 질문이 결혼과 출산 뒤에야 생겼다. ‘이 일은 앞으로도 나를, 나의 가족을 지탱할 수 있을까?’ 많은 비영리 활동가가 비슷한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AI 시대, 어찌 비영리 영역만 그러할까 싶지만 비영리 영역에서 ‘돈’은 일종의 금기거나 유머 중 하나로 작동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만나 본 활동가들은 자산이나 재테크 이야기는 ‘나와 상관없는 영역’으로 선을 긋거나 “돈 없는 자의 신세”를 블랙코미디마냥 웃어넘겼다. 나도 덩달아 웃었던 것 같다. 생애주기가 바뀐 뒤 나는 식어버렸다. 마땅히 토로할 때도 없다. 언제부터 내 마음에 불순물이 내려앉아버린 걸까. 나라는 사람이 욕심이 많은 걸까. 욕망이 넘쳐 흐르는 걸까. 주어진 것에 감사함조차 모르는 배부른 소리인 걸까. 일에 대한 의미를 평가절하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답없는 질문만 떠오른다.
10년 동안 비영리 단체를 오가며 느낀 건 이 질문들이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영리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의 공통된 균열은 ‘가치와 생계의 간극’에서 시작될 수 있다. 적어도 내 경험으론 그렇다. 어쩌면 이것은 욕심이 아니라 삶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찾아오는 질문일지 모른다. 이 질문의 끄트머리를 잡고, 나는 비영리에서의 ‘딜레마’를 해체하고, 들여다보고, 나를 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