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의미

최은영 장편소설 <밝은 밤>

by 오늘

- 새비는 아시까?

- 뭐를요.

- 내 아바이가 백정이었단 기요.

새비 아주머니는 그녀를 멀뚱이 쳐다봤다. 무슨 뜻으로 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아... 아즈마이가 고생을 많이 했다구, 아바이가 돌아가시고 혼자 밥 벌어 어마이 모시고 살았다구 들어 알았댔어요.

입가에 김칫국물을 묻히고서 천진한 얼굴로 새비 아주머니가 말했다.

- 고생 많았어요, 아즈마이. 고생 많았댔어요.

증조모는 그렇게 말하는 새비 아주머니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눈물을 참으며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중략...)

자기가 한 밥을 먹고 맛있다고 말해준 사람도 증조모에게는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이었다. 증조모는 그 아이 같은 얼굴을 오래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증조모의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기운 마음으로 뒤뚱거리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최은영 장편소설 <밝은 밤, 64쪽>







어른이 되어서도, 내면의 혼란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면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뒤엉켜 있는 감정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도망가고 싶어질 때가 많다. 그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어리석어지는 것이다. 내면의 빛이 꺼져 완전한 밤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길을 잃는다.


개인의 상처와 관계성에 대해 섬세하면서도 따뜻한 필체로 그려왔던 최은영 작가의 장편소설 <밝은 밤>을 읽었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단절과 연결을 반복적으로 서술하며 외롭고 서러웠던 개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또한 개인의 삶을 복원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기억을 통해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설은 지연이 이혼 후 혼란과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희령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희령은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는 작은 마을이며, 지연에게 아름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유년의 기억이 숨겨져 있는 장소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곳, 그곳이 희령이다. 지연은 그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이 끊겼던 할머니를 만난다. 지연은 할머니를 우연히 만난 것에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감정들의 바닥에 깔린 열디 엷은 우애(23쪽)'를 신기해한다.


할머니는 은근한 친근함으로 지연에게 다가온다. 지연은 할머니와 저녁식사를 하다가 자신과 닮은 증조모의 사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서로를 삼천이와 새비로 부르며 평생 가까이에 있었던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새비 아주머니는 백정의 딸이었던 증조모의 외로움과 고통을 온전히 이해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조선말 계급의 문제와 일제강점기 여성의 삶, 전쟁으로 인한 국가폭력 등 역사의 그늘을 선명하고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연은 증조모 삼천과 새비 아주머니의 시간을 건너 자연스레 할머니의 유년시절 이야기도 듣게 된다. 할머니의 삶에서도 폭력적인 역사와 가부장제라는 시대의 가치관은 개인의 상처로 치환된다. 증조부는 할머니가 자라는 동안 조금도 감정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그 '목마른 느낌 (219쪽)'을 안고 할머니는 증조부가 결정한 대로 아무렇게나 결혼했으며 결국 딸을 낳은 뒤 버림받았다. 할머니는 생활력이 강했고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 자매처럼 자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딸 희자가 대학에 입학하자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지며 냉소적이고 위악적인 태도로 살아간다.


지연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외면해 왔던 혼란과 고통스러운 감정에 점차 직면하게 된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이혼, 사과받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버린 마음, 숙제하듯 무감하게 살아내는 하루, 자신의 상처를 후벼 파는 원가족, 그리고 언젠가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치부해 버린 언니의 존재까지.


지연과 원가족의 갈등은 엄마, 그러니까 할머니의 딸과의 관계에서 가장 증폭되어 그려진다. 엄마는 지연에게 정상가족의 잣대를 들이대며 사회적 시선으로 지연을 평가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인물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관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상처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가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열 살도 채 못 살고 죽은 지연의 언니를 마음에 묻은 기억이 있었다. 엄마는 언니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며 죽은 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한다. 지연은 언니의 죽음 이후 부모로부터 온전히 사랑받지 못하고 외롭게 유년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여전히 아프다.


<밝은 밤>에서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은 기억과 연결된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행위이자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또한 듣는 사람에게 기억을 전달해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할머니가 지연에게 전해주는 이야기 속 인물들은 현시점에서 대부분 죽은 이들이다. 고령인 할머니 역시 남아있는 날들은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마음속에 기억된다면 상징적으로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과 같다. 지연이 언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상당 부분 트라우마와 자기혐오로부터 해방된 이유는 기억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기억을 주고받기 위해 필연적으로 우리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기억을 이야기하는 한 우리는 외롭고 서럽지 않다. 그리하여 <밝은 밤>은 가장 어두운 밤의 이야기이자 잔잔한 빛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밤의 이야기가 되었다. 내면의 빛이 꺼져 길을 잃더라도 누군가의 빛이 다시 우리를 비출 것임을 이제는 안다. 결국 우리는 걷게 된다. 눈물 때문에 숨이 막혀 잠깐 멈추더라도 어쨌든 걷기는 걷는다. 그때 우리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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