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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Sep 18. 2024

하루살이 떼 머리 위에 흩날리고. 021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인생 <레이먼드 카버 / 고영범>

작가에게는 날것 그대의 삶이란 고스란히 동감 넘치는 작품의 소재가 된다.

   

   레이먼드 카버 Raymond Carver.


카버의 삶은 자연스럽게 붙어 있어야 할 '삶'과 '사람'과 '사랑'이 결렬되고 또 말라붙고, 그래서 고통받은 것이다. 그 고통의 기억이 그 결렬의 봉합 가능성을 보려 한 것이 그의 문학이다. <레이먼드 카버 / 고영범>


하지만 눈앞에서 삶의 소중한 것들이 원하지 않은 모습으로 뭉개지고, 사랑하는 이들이 산산이 흩어지는 순간들을 그저 당하듯이 지켜봐야 하는 현실은 잔혹한 지옥 된다.  상황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다가 아버지처럼 '술병' 말았다. 독주로 온몸과 영혼이 만진창이가 되어 인생의 바닥 드러누워 마지막을 생각할 음에 삶의 기회는 언제나처럼 '우연' 찾아왔다.


그는 지금 평생 원하던 삶을 누리고 있다. 소설 <대성당> 이후로 꼬박 3년 동안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작가적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가고 오랜 가난에서도 벗어났다. 하지만 사냥을 나가 들판에 누워도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고 낚시를 해도 이미 헤어진 전처와 가족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내 아버지는 죽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이제는 다 자란 아들과 딸 처지가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기도 어렵다.

그 아이들은 나를 한번 길게 쳐다보고 나서

내가 저지른 실수들을 그대로 반복하려 애썼다.

...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수천 마일밖에 있다.

하지만 그들은 링둔 이 오두막 안에도 있다.

그리고 요즘 내가 자다 깨어나는 모든 호텔 방들에도.

...

눅눅한 대기 속에 라일락 향기가 있다.

하루살이들이 라일락 위를,

내 사랑하는 이들의 머리 위를 맴돈다.

수백 마리의 하루살이들이.

...

하루살이들이 허공에 떠있다.

수레가 지나가는 동안.

물고기들이 올라오는 동안. <책상/울트라마린 p93~95>


인생의 정점에 서있지만 과거의 아픈 추억들이 그의 머리 위로 수백 마리의 하루살이가 되어 되살아난다.

부모님, 이혼으로 흩어진 가족들, 똑같이 알코올중독으로 불행한 삶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자식, 가난으로 인한 아픔과 가족에게 입힌 상처들, 그 모든 과거의 인연과 고통들이 그가 움직일 때면 하루살이 떼처럼 함께 움직인다. 


카버는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 금은 곁에 없는 수천 마일밖에 떨어진 '사랑하는 이'들을 회상한다. 함께 할 때는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던 인연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카버는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의 부 책상 위에 깊게 파인 흔적처럼 장 행복해야 할 순 즐기지 못하게  낙인 같은 상처가 되었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사내로 살아온 그는 생 그의 삶 속에서 늘 어긋나기만 했던 '가족''사랑'이라는  퍼즐을 제대로 맞춰보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무덤에 새겨진 생전 마지막 시에서 그런 갈망이 느껴진다. 그는 이번 생에서 얻기를 원하던 것이 "스스로 자신이 사랑받는 인간이었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썼다.


어쨌거나 이번 생에서 원하던 걸

얻긴 했나?

그랬지.

그게 뭐였지?

내가 사랑받은 인간이었다고 스스로를 일컫는 것, 내가 이 지상에서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것.  <말엽의 단편 Late Fragment>


마틴 부버는 "감정은 사람 안에 깃들어 있고 사람은 사랑 안에 산다"라고 했다. 사랑이란 나 자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마주한 대상과의 '사이'에 존재한다. 랑은 결코 '나'에게 달라붙어서 상대를 나의 소유물이나 또 다른 나라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려는 감정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머물러있으면서 사람을 바라볼 때에는 사람은 그 하나하나가 자유롭고 유일무이한 존재요, 또한 하나의 '너'가 되어 내 앞에 어엿이 서있는 인격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너'에 대한 '나'의 책임을 의미한다. <나와 너/마틴 부버>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사내였던 '카버'가 느끼고 싶었던 '사랑'이 과연 마틴 부버가 말한 런 사라면 이제는 카버는 결코 가질 수 없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제대로 베푼 적 없는 부모였고, 자신의 알코올중독과 가정폭력으로 인해 평생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아내와 자녀들이지만 이제는 그의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사랑하는 이들을 책임질 수 없다는 암담함에 지금 눈앞에 펼쳐진 작가로서의 명성과 부,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로 둘러싸인 인생절정의 순간을 오롯이 음미하고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 머리 위로 떼 지어 흩날리는 하루살이들을 바라보면서 깊은 회한에 빠지다가 애써 스스로 사랑받은 인간이었다고 자위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레이먼드 카버'.


관계는 상호적이다. 미움은 가장 가까이 있기에 생겨나는 감정이다. 그리고 맹목적인 감정이다. 상대방의 부분밖에 보지 못할 때 생겨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카버'는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사랑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사랑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미움으로 인한 삶의 '고통'과 '결렬'이 뒤범벅된 그의 문학작품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그리고 하루살이 떼 흩날리는 그의 실제 삶을 통해서도 말이다.


그리고 삶이란 늘 우연처럼 우리를 찾아오고 사라짐을 굴곡진 '레이'의 인생을 통해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P.s <레이먼드 카버/고영범>,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읽고 <대성당>을 읽으려고 구입해서 리뷰 중에요. 작가들의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의 작품을 읽으며 많은 걸 배우고 느끼네요. 아픈 그의 삶이 위로도 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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