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하기] 탈고의 허전함

현타에 대하여

by An

5월 1일 칼럼이 게재됐다. 6개월 만에 이름을 걸고 글을 내보냈다. 겨울 내내 저널리즘에 회의했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으나 나는 그러한 글쓰기에 박수를 치지 못했다. 비평을 하면 사람과 부대낄 수 있다고 믿었다. 비평적 저널리즘 글쓰기를 시도했다. 칼럼에는 현장성이 조금씩 사라졌고, 논증이 다소 약화됐다. 저널리즘도 아니고, 비평의 문법을 따른 것도 아닌 쓰레기가 나왔다. 나는 끝내 후련함보다 능력 부족에 스스로 자책해야 했다. 손이 차갑게 굳었다. 입술이 바스락거렸다. 아, 어쩌자고 이런 걸 쓴 것이냐. 사실과 해석을 무기로 나는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했다. 처음부터 경계의 글쓰기를 하였으니 의도된 실패다.


지난 1월 4일, 비상계엄 사태로 뒤숭숭할 때 한 언론인에 대한 평전이 기자협회보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동아투위 2대 위원장 안종필 기자에 대한 기록이었다. 전설 같은 선배 언론인의 설화가 내려오고 있으니 동아투위에 관심은 있었으나 구체적인 인물의 평전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안종필 평전>이라 게재되기 시작한 연재 기사를 꼬박꼬박 읽었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로 읽고, 프린트를 해 밑줄을 그었다. 눈길이 자주 멈추는 문장마다 기자님의 혈흔이 보이는 거 같아 멈칫했다. 얼마나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이를 구했을 것이며, 취재록을 어렵게 정리하였을 터. 문장 하나하나에 주저흔이 보였다. 겨울 바람은 산들 바람으로 바뀌었다. 34편의 연재가 끝났다. 나는 안종필 위원장에 대해 기록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짤막한 메일을 보냈다. 하루 뒤 예상치 못한 답장이 돌아왔다.


꾹꾹 눌러 담았다는 표현이 맞을까... 기자님은 평전을 쓰는데 자기 자신을 전부 건 것만 같았다. 답장의 첫 문단부터 자신의 능력 부족, 자책감을 고백하셨다. 그 감정은 끝까지 글쓰기의 최전선을 도전하는 사람만 느끼는 감정이다. 안 위원장의 방대한 맥락이 서른네 편에 싣기에 모자를 수도 있지만, 유한한 글쓰기란 원래 그런 것이지 아니었던가? 대하드라마를 쓰기로 한 누구라도 느끼는 연재 마감의 압박이 있지 않았던가? 기자는 언제나 마감의 철칙을 준수하여야 한다. 기자의 글은 늘 어딘가 부족한 상태로 세상에 나가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 글쓰기는 패배의 실천이다. 패배로 나아가는 과정이 글쓰기고, 패배하는 게 글쓰기의 목적이다. 글쓰기는 패배의 미학이다.


글쓰기에 성취를 느꼈다면, 그건 타고난 부러운 재능이기도 하지만 쉽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유가 아니다. 똑똑한 사람은 확신하지만, 총명한 사람은 회의한다. 똑똑한 사람은 해박하지만, 총명한 사람은 우직하다. 똑똑한 사람은 명료하지만, 총명한 사람은 입체적이다. 나는 후자를 더 신뢰한다. 후자가 겪는 현실의 두터움은 전자의 그것보다 두터울 것이다. 후자가 표현하는 감수성의 질은 내적 필연성에 닿아 있어 정직하다. 문장의 진심이 그러하다. 어느 분야에서 문장을 써내든 총명한 이의 글엔 분투의 흔적이 서려 있다. 나는 그 문장을 언제나 신뢰해 왔다.


나의 글엔 확신도, 회의도, 해박함도, 우직함도, 명료함도, 입체감도 없으니 그건 불행한 일이다. 작년 11월에 장편소설로 기획했던 것을 평전으로 바꾸자고 마음먹은 지도 3개월인데, 어딘가 막막함부터 몰려온다. 5월, 르포르타주 탐사보도도 기획했지만, 나는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 구조주의에도 천착해야 하고, 미디어나 노동 의제를 골라 파고 들어보기도 해야 하는데, 나는 끊임없이 불안하다. 아, 이것은 탈고의 허전함이다. 시간이 지나면 또 잊고 쓰고 있을 테다. 나는 내 자아에 괴로워했다.


나는 써야 한다. 나머진 다 제쳐두어도. 내가 평전을 쓰기로 한 까닭은 간단하다. 내가 정한 대상이 시대의 이율배반적인 지식인이었으며, 나는 언제나 그러한 이율배반성에 관심을 가졌다. 2020년 <전쟁과 평화>(톨스토이)를 읽은 시절부터, 나는 그러한 세계상을 그리는 것을 흠모해 왔다. 내 자신도 계기가 됐다. 내가 이율배반적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지켜보며 견딜 수 없었다. 이 작업은 나의 작은 참회다.


이름을 걸고 5년째 글을 쓰지만, 미미한 조회수에도 나는 몹시 두려워했다. 나는 그래서 소위 '기자질'(선배의 용어를 빌리자면... 많은 게 함축되어 있다)에 도전할 깜냥이 되지 못한다. 내게 글쓰기는 예술이 아니라 노동의 한 종류에 불과하지만, 몹시 괴로운 종류의 노동이다. 나의 원천과 동력은 저 자본에 걸려 있으니 나는 부끄럽다. 무언가로 업을 삼는다는 것은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소시민으로 살아가지만, 시민은 원래 작다. 나는 신자유주의니, 증세니, 감세니, 긴축이니, 뭐니 거대 담론을 떠들어대는 자를 사기꾼이라 부른다. 그러니 무언가에 업을 삼고, 삼기로 한 이상 당신은 프로다.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아, 이것이 방금 막 탈고한 자의 헛된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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