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생활 언어학습이 최고!
여기에도 한국처럼 장날이 있다고, 지인을 따라서 매주 수요일, 토요일마다 열린다는 시장에 가보았다. 지도를 열고 검색하면 못 갈 곳이 없지만, 항시 열려 있는 것이 아닌 정기 시장은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대형 마트에만 가다가 시장에 가니, 한국의 시장처럼 와글와글 활기가 느껴진다. 넓은 공터에 행사용 몽골텐트가 즐비하고, 채소, 과일, 정육, 수제 소시지와 치즈, 우리나라의 반찬가게에 해당하는 각종 절임을 무게로 달아 파는 가게, 옷부터 잡화 등등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기한 것은 골동품을 마구 늘어놓고 고를 수 있는 골동품상과, 알파벳으로 Kimchi라고 써놓은 김치였다. K 컬처의 열풍에 힘입어 폴란드 현지인이 담은 김치일까? 때깔은 비슷해 보이는데 맛이 어떨까 궁금했지만, 도전해보진 않았다.
처음 왔을 때 외국인과 눈만 마주쳐도 불편하던 나였지만, 이제는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할수록 어려움과 어색함이 옅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마트에서는 혼자 돌아다니며 물건을 고르고, 셀프 계산대에서도 언어를 영어로 변경해서 혼자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었지만, 시장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가판에 쌓여있는 감자를 얼마만큼 달라고 말을 해야 하고, 가격이 얼마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며, 해당 금액만큼 현금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었다. 폴란드어로 '진도브레, Dzień Dobry (안녕하세요)'와 '진쿠예웅, Dzienkuję (감사합니다)'만 가지고는 꿀 먹은 벙어리로 있을 수밖에.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숫자가 쓰인 계산기를 보여주는 상인은 오히려 고마웠다. 시장에 오는 상인들은 대부분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짧은 나의 영어조차도 무용지물인 것이었다. 번역기? 실행에 옮겨보진 않았지만 시장통에서 번역기를 들이미는 것은, 마치 순대국밥 식당에 가서 크기별 포크와 나이프를 갖춘 서양식 식사테이블을 요구하는 모양새 같달까.
화상으로 폴란드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3,4주쯤 되었을 때, 선생님과 폴란드어를 접하는 일상을 이야기하다가 나의 시장 보는 일상을 전했다. 가격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나는 항상 100 즈워티 지폐를 낸답니다.
"Really? Did you get the correct change?
폴란드인인 선생님은 거스름돈도 제대로 받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나 보다. 얼마인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시장 상인이 돌려주는 거스름돈이 옳은 금액이라고 믿을 수밖에. 내가 만나는 현지인들이 정직한 사람들일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는 외국인의 현실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이런 어려움을 겪겠지? 한국에 돌아가면 필히 외국인들을 발 벗고 도와주리라.
그날부터 선생님은 기존 계획을 앞당겨 숫자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Jeden(1), Dwa(2), trzy(3), cztery(4).... 매 시간마다 20, 30~100까지 숫자 세기 연습이 이어지던 어느 날, 드디어 시장에서 감자 Jeden Kilogram(1kg)을 청하고, czternaście(14) 즈워티를 알아듣고는 20 즈워티 지폐를 건네는 데 성공했다! 폴란드 사람들은 대체로 아주 친절해서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 이런저런 야채를 사가는 모습을 신기하면서도 즐겁게 바라보는 듯했다. 'ile to kosztuje?(얼마예요?)'라고 폴란드어로 물어오는 외국인에게는 더 친절한 웃음을 보여주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외국어라고는 20대 초반까지 영어와 고등학교 시절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운 적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책으로 공부할 뿐이었다. 이렇게 단어 하나, 문장 하나까지 실생활에서 활용해 가며 배우는 외국어는 이토록 재미있는 것이었다.
점차로 시장에서 보이는 감자, 양파, 시금치를 폴란드어로 읽을 수 있게 되자, 까막눈으로 컴컴한 벽을 짚고 걸음 걷던 나의 시야는 아주 가느다란 빛이 한줄기, 두 줄기씩 늘어가고 있었다. 둘째가 어릴 적 한글에 관심을 가져 한 글자씩 읽게 되던 6살쯤 무렵이었나, 한국에서 대형마트에 갔을 때였다.
'매....... 장... 입..... 구......?...!'
"매장 입구?!! 엄마 매장 입구래! 매장입구!! 매장입구!! 매장입구!!"
주차장에 커다랗게 쓰여있는 '매장입구'라는 글자를 한참만에 읽는 데 성공한 아이가 갑자기 외마디를 지른 것이었다. 유아용 카시트에 조용히 앉아있던 아이가 별안간 반갑게 소리치던 상황을 가늠해 보자니, 떠듬떠듬 읽어낸 그 글자가 입구라는 표시였던 것을 알아차린 아이의 놀라움!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 아이의 반가움이 그런 것이겠거니 이해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의 짐작은 아이의 기쁨에는 겨우 티끌만큼 접근했을 뿐임을 이제야 느낀다. 깜깜한 세상에서 살던 눈뜬 심봉사가 매장 입구를 알아봤을 때의 감탄사를 나도 이곳 폴란드에서 내지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도시를 가던, 어느 나라를 가던 시장구경을 좋아하는 남편은 어릴 때 시장골목에서 자랐다고 했다. 내가 폴란드 시장 구경 갔던 이야기를 조잘조잘 해대자 눈을 빛내는 남편. 아직 취미 활동 하나 없이 심심한 주말 아침 아이들은 늦잠을 자는 사이, 둘이서 시장 구경을 가기 시작했다. 가족보다 6개월 먼저 바르샤바 생활을 시작한 남편이 마트나 운전, 주유 등 생활 전반을 유치원생 데리고 다니며 일러주듯이 알려줬었더랬다. 그런데 이제는 남편을 이끌고 가서 폴란드 단어를 대강 알아들어가며 찬거리를 사는 아내가 새롭게 보였나 보다.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남자.
"안녕하세요."
사과를 고르고 있다 보니, 뒤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도, 분위기도, 결정적으로 한국의 대기업 로고가 박힌 점퍼를 입은, 확실한 한국 사람과 꾸벅 인사를 하고 있는 남편.
"한국 사람을 만나면 모르는 사람한테도 자동으로 인사가 나오네, 거참."
모국어 한국말은 그 시끄러운 시장판에서도 귀에 꽂히니, 신기한 일이다. 한국말이 들려서 돌아봤더니 마찬가지로 아내와 같이 온 듯한 저쪽 남자도 꾸벅, 이쪽 남자도 꾸벅 서로 인사를 나눈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한테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 인사가 나왔다는 사실에 멋쩍어지려는 순간, 그 멋쩍음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상대편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그때, 문득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나에게서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끈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였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했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일인데, 외국인들 속에서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살아가는 우리는 같은 한국인들을 만날 때면 아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 자동 반사적으로 인사가 나오는 게 아닐까. 나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이다가 생각하는 것이다. '아차, 나 저 사람 모르는 사람이지.'
남편과 나는 직접 김장을 할 생각으로 필요한 채소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배추와 무, 파 등등 한국의 채소들을 대체하여 김치 맛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한국에서 파를 한 단, 두 단 묶음으로 파는 것과 달리, 가느다란 쪽파 줄기 대여섯 개를 고무줄로 묶어 3 즈워티(천 원 정도)로 판다. 김장용이든 뭐든 파는 많이 필요한 법, 스무 개는 필요하겠지. 폴란드어로 20이 뭐였더라... 기억을 더듬으며 어버버 하고 있는데 남편이 말한다.
"Twenty please."
그러나, 상인은 영어를 모르는 모양이다. 옆에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폴란드인이 우리 상황을 보고는 폴란드어로 도와주며 웃는다.
"Dwadzieścia(20). 이들은 20개를 원하네요. 꽃다발을 만들 건가요?"
'Flower'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하니, 웃으면서 크고 과장된 모양의 손짓을 한다. 아마도 스무 개나 되는 파를 원하는 우리가 그들에겐 신기해 보였을 테다. 파로 만든 꽃다발이라니. 한국인 그 누가 파 한 단을 두고 꽃다발을 떠올릴까. 이런 소소한 일상에서도 나는 한국에서만 살아오는 동안 느껴본 적 없었던 경험을 하는 것에 즐거웠다. 내가 이렇게 이질적인 세상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모든 경험이 값진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숨겨진 모험 욕구는 아닐까.
그렇게 나는 폴란드어와 폴란드 사람들에게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생각했다. 경험이라는 것에 대해.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것들의 집합체가 현재의 나라는 것. 그리고 지금도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은 미래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 이 세상에 동시에 나온 쌍둥이조차도 경험하는 세상은 다르고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군상들은 각자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 좋든 싫든 과거의 경험이 만들어놓은 현재의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니면 또 어떤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이들이 다른 세상을 살며 자기만의 기준이 있을 테니,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타인의 잣대에 비치는 나를 신경 쓰는 것도 필요 없지 않을까. 나는 그냥 현재의 내 경험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미래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경험을 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서 어떤 하루를 살고 있나. 나는 어떤 경험을 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