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딱따구리

추억 개키기

by 김글인

폴란드에 와서 좋은 점 중 하나는 공기가 깨끗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턴가 도시를 벗어나 탁 트인 산이나 바다에 가도, 미세먼지로 인해 흐릿한 간유리 필름이라도 끼워둔 것 같은 희뿌연 풍경이었다. 여기는 한 나라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맑고 깨끗한 공기 덕에 하늘빛이며 눈부신 햇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고, 날씨는 생각보다 일상의 정서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생처음 살아보는 주택인 데다, 작으나마 정원을 끼고 있으니 햇빛이 환한 낮에는 초록초록한 창밖으로 자꾸 시선이 갔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커피 한잔을 마시는 내 시야로 아파트의 사각 격자무늬가 아닌 자연의 프렉탈 무늬를 감상하는 건 의외로 소소한 힐링이 되었다. 울타리 너머 이웃집은 정원 건너편이라 서로의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았고 자동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아서, 조용한 일상을 가질 수 있는 이런 게 전원생활이라 할만하구나 싶었다.


햇빛 좋은 어느 날, 커피 한잔을 들고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는데, 때아닌 작은 눈송이가 떨어진 듯했다. 바람 없는 맑은 날, 계절은 아직 가을이니 잘못 봤나 보다 생각했지만, 다시 언뜻언뜻 분명 하얀 입자가 날리고 있었다. 바깥 기온은 10도. 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찬란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맑은 하늘이다.


'정원에 나무가 많으니, 자연의 무언가겠지 뭐.'


며칠 후, 창가에서 또 한 번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이번에는 밖에 나가서 거슬리는 그 무엇이 또 떨어지길 기다리기로 했다. 나서서 보니 정원 한편에 마치 굵은소금을 뿌려놓은 듯, 하얀 입자가 잔뜩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소금의 정체는 스티로폼 부스러기. 그 위에는 나무도, 지붕도 없고 건물 외벽과 울타리가 둘러서 있을 뿐인데, 이게 왜?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갸웃거리는 순간, 하얀 외벽에 뭔가 검은 형태가 순간적으로 스치더니, 하얀 가루를 머리에 뒤집어쓴 새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 벽을 박차고 푸드덕 날아간다. 푸드덕 날개를 치는 순간, 가벼운 하얀 입자는 새에게서 화들짝 떨어져 천천히 흩날리며 땅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워낙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라 순간 멍해졌다. 방금 그게 뭐였지?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지붕 아래, 2층 딸아이의 방 창문 옆 외벽에 구멍이 하나 있었다. 지름 10센티 정도의, 기계로 뚫은 듯 정확히 동그란 구멍인데, 저기에서 본 게 맞나? 내가 본 게 맞나? 가스나 물의 배관 용으로 뚫어놓은 구멍인가?


다음 날, 나는 눈이 내리는 때를 기다렸다가, 가만가만 살금살금 나가, 드디어 숨죽여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 동그란 그 구멍에서 새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더니, 인기척을 느끼고는 또 한 번 푸드덕, 스티로폼 눈을 뿌리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나붓나붓 나를 향해 우아하게 떨어지는 스티로폼 눈. 부리가 길게 보이는 걸 보니, 딱따구리 같은 새인가? 새가 구멍을 낸 거구나! 세상에! 근처 숲이 있는 공원에 갔을 때 딱따구리가 나무에 앉아 부리를 쪼아대는 소리에 온 숲이 울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슬슬 기온이 낮아지며 늦가을에 접어들고 있는 때였다. 딱따구리도 월동 준비를 하는 모양이지만 집에 구멍을 내는 건 문제가 있다. 외벽 콘크리트가 얼마나 얇고 약하길래 새가 부리로 구멍을 낼 수 있단 말인가. 벽에 단열재가 들어간다는 건 알지만, 콘크리트를 뚫고 스티로폼을 파내어 새가 들어갈 정도라면 어느 날 방 안까지 터널이 뚫리는 건 아닐까? 내 상상의 끝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집에 문제가 생길 경우 집주인에게 알리는 것은 세입자의 의무. 새가 집 외벽에 구멍을 냈어요. 뭔가 조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며칠 후, 집주인이 방문하여 구멍과 스티로폼 눈을 살폈다. 조금 놀라는 눈치이긴 했으나, 어떤 조치를 취해주길 기대하는 세입자에게 보낸 메시지는 나의 현실적인 상상과는 달리, 동화였다.


"집에 구멍을 뚫은 것은 이 새였습니다. 폴란드에서는 겨울에 매우 흔하며 따뜻한 구멍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폴란드 사람들은 이 새가 당신의 집을 선택하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습니다."





친절하게 새 이미지까지 첨부해서 보내주며 안심시키는 집주인을 친절하다고 해야 하나. 우리나라에도 있는 자연 친화적인 미신이 여기에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 나라에서 제일 큰 도시인데, 동화나 소설 속에서, 혹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나 들어봤음직한 새와의 동거가 시작되는 건가. 타국살이에서의 에피소드는 정말 다방면에서 벌어지는구나. 정말 바르샤바에서 우리 가족이 겪는 이 모든 이야기들로 책 한 권 내고도 남을 것 같다. 그날까지 온전히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잘 살아가려면 현실 세계의 황당한 사건들도 동화 속 이야기처럼 잘 다독여 개켜두는 지혜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딸에게 내밀며 함께 읽었던 <피터팬>의 구절을 떠올려본다.


'아이들의 하루 개키기'

달링 부인이 처음 피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이들의 생각을 정돈하면서였다.

아이들이 잠든 후에 머릿속을 뒤적거려서 낮 동안 어지러웠던 것들을 제자리에 가지런히 두고 다음 날 아침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은 훌륭한 어머니들이 밤마다 하는 습관이다.

만약 여러분이 밤새도록 깨어있다면, 여러분 어머니들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서랍을 정돈하는 것과 같다.

아마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여러분 마음속의 생각들을 재미있게 뒤적거려 보면서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놀라기도 하고 예쁜 생각들과 그렇지 못한 생각을 찾아내서, 행복하지 못한 것들은 마치 새끼 고양이를 다루듯 부드럽게 뺨에 문지르다가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곳에 쟁여 두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침에 잠에서 깨면, 어젯밤 잠들 때 가지고 있던 장난기나 나쁜 욕심들은 작은 조각으로 접혀서 마음의 맨 밑바닥에 깔려 있다.


딱따구리가 정말 겨우 내 우리 집 벽 속에 살기 시작하면 어쩌나, 딸아이의 방에 어느 날 갑자기 딱따구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들어오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들을 나는 찬찬히 어루만지며 뺨에 문지르다가 차곡차곡 개켜 마음의 밑바닥에 깔아 두었다. 그리고 이제 막 낯선 타국에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지금, 겨울을 나기 위해 우리 곁을 찾아온 딱따구리를 조금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믿거나 말거나 딱따구리가 우리 집을 선택했으니 우리 가족에서 행운이 따라올 거라는 예쁜 믿음으로 내 생각 서랍 속 가장 위에 올려두기로 했다.


"엄마, 마트에 갔을 때 나무로 만든 새집을 팔던데? 그거 하나 사다가 놔주면 어때? 딱따구리가 거기를 집으로 옮겨가지 않을까?"


그래, 네 방 옆에 구멍을 내고 있는 예비 침입자를 잘 달래서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나중나중에 우리 이 모든 추억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펼쳐보자. 그날을 향해 나아가는 지금, 나는 매일매일 빨래만 개킨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우리의 예견된 추억들도 소중히 개켜두려고 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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