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오는 언제부턴가 연오의 우람한 어깨가 설레고 듬직해 보였다. 의외로 비바람을 잘 견뎌내는 강단에 반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나타나면 심쿵하고, 돌아서면 섭섭하고, 안 보이면 그립다. 사랑이었다.
“나 어때? 예뻐?”
세오가 발그레한 얼굴을 바싹 붙이고 짐짓 눈을 깜빡이며 장난스레 물었다.
연오의 귓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쁘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쁘다.
연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세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색다른 총기가 반짝인다.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다.
“우리 혼례, 지금 여기서 올릴까? 너와 나 단둘이서….”
뜻밖의 말에 연오는 얼떨떨하였다.
두 사람은 사흘 후에 혼례를 치르기로 되어 있다. 큰까막골의 경사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뭘 올리자고? 연오는 두 귀를 의심했다.
세오는 혼례가 예정대로 치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연오와 처음 만났을 때 신력으로 그의 운명을 엿보았다. 수평선 위로 날아가는 삼족오다. 그는 머지않아 고향을 떠나야 할 것이다.
옛 동요를 듣고 비로소 확신을 갖게 되었다. 미완의 마루치에게는 선조들이 예언의 노래로 전한 임무가 있다. 삼족오의 화신으로서 새날을 여는 일이다.
연오와 세오가 부부의 연을 맺는 건 본래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알고 보면 불구대천의 두 사람이다. 선대의 피맺힌 악연은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신력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장로들을 움직여 이 혼례와 계승식을 계획한 건 천군 준오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분명히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세오는 그러나 사랑이 악연에 짓밟히는 걸 용납하지 않을 작정이다. 설혹 혼례가 파국을 맞더라도 부부의 연을 맺을 방도를 찾고자 했다.
‘해와 달이 만나는 새날’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그날을 기약하자면 사랑의 이정표를 세워야 한다.
합환(合歡)은 스쳐 지나는 운명을 끌어안고 지독한 악연의 고리를 끊으려는 그녀의 순정한 의지였다. 작정한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연오에게 술을 따르고 세오가 잔을 들었다.
“이거 합환주야. 우린 이제 부부가 되는 거고.”
당돌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연오는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잔을 비웠다.
“속사정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아. 다만 하나는 분명해. 지금 이 순간 네가 진심이라는 거. 그리고 하나 더. 내가 아는 누구보다 네가 현명하다는 거.”
곧 마루치가 될 사람이다. 부족이 정한 혼례를 코앞에 두고 경솔한 일을 벌이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된다. 만약 천군이 알게 된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세오의 뜻을 오롯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랫동안 연모해 온 첫사랑을, 부족의 미래를 밝혀줄 아름다운 정혼자를, 연오는 믿고 싶었던 것이다.
세오는 손을 저어 등잔불을 끄고 창가로 가서 돌아섰다. 얇은 비단을 씌운 창문으로 달빛이 은근히 방안을 비추는 밤이었다.
사르륵, 저고리 고름을 푸는 소리에 연오의 맥박이 세차게 달음박질했다. 산호 비녀를 뽑으니 흑공단 같은 머리채가 가녀린 어깨를 덮으며 흘러내렸다.
이윽고 세오가 수줍게 돌아서며 달빛 아래 반라의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지상에 강림한 월궁 선녀를 삼족오의 화신은 넋을 잃고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터질 듯한 가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다가서자 연오는 아슴아슴 숨이 막혀왔다. 향긋한 내음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 억센 팔로 세오를 꼭 끌어안았다.
세오는 요염하게 허리를 비틀며 두 팔을 연오의 목에 두르고 가슴을 뭉클 밀착하였다. 달콤한 숨결이 얼굴에 닿자 연오는 아찔한 황홀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고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강철같은 몸은 꿈에 그리던 풀무질에 부드럽게 녹아내렸고, 백옥같은 나신은 상사(相思)의 단쇠를 품고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월하노인의 적승(赤繩)이 부부의 인연을 맺어주고, 해와 달의 정기가 새날의 씨앗을 잉태하는 아득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