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오가 술상을 준비하는 동안 연오는 혼자 추억의 책장을 넘기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산마루에 내려앉은 저녁노을이 그 숨결을 따라 곱게 번져갔다.
“내가 빚은 화주(火酒)야. 독하니까 조금씩 마셔.”
세오는 초옥 마당에 묻은 항아리에서 화주를 꺼내 조롱박에 담아왔다. 연오가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안 독한데? 술이 달아.”
그녀가 후계자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요즘 사는 게 쓰구나. 그러니 독한 술이 달지.”
연오는 화주를 연거푸 들이키다가 멈칫하였다. 어흠, 내색하고 싶지 않은 걸 들켜버렸다는 듯이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입가에 미소를 흘린다. 어색한 침묵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잠시 말을 고르다가 관두고 그는 뜬금없이 노래를 불렀다.
“하늘과 바다가 껴안는 곳에서 / 해와 달이 만나 새날을 여니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어린 시절 아버지가 무릎에 앉히고 가르쳐 준 옛 동요다. 혼자 남겨진 소년은 이따금 바닷가 언덕으로 달려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거북을 불러보곤 하였다.
“이 노래가 내게는 주문이었어.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하고 노래하면 수평선 너머로 뭔가 꿈틀거리며 나타날 것 같았거든.”
세오는 연오의 노래가 좋았다. 낮고 굵은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깃든 음색이 잔잔했던 마음자리에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그것은 하늘과 바다가 껴안는 수평선의 노래였다. 또한 해와 달이 만나는 천변(天變)의 노래였다.
세오는 전율했다. 연오는 몰랐지만 이 노래에는 선조들의 예언과 주술이 담겨 있었다. 미완의 마루치에게 새날을 열어줄 희망의 열쇠가 거기 감춰져 있었다.
천군의 딸인 세오는 남모르는 비밀을 간직하고 살았다. 비범한 기운을 품은 사람을 만나면 섬광처럼 환영이 번뜩이며 그이의 운명이나 미래가 떠오른다.
제사장 혈통으로 물려받은 신력이었다. 원래 영험한 남자 후손에게 나타나는데 여인의 몸으로 갖게 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 특별한 능력을 비밀에 부쳤다. 아버지에게도 밝히지 않고 함구했다.
신력은 스스로 얻은 게 아니다. 숙명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운명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10년 전 연오를 처음 만났을 때 본 것은 수평선 위로 날아가는 삼족오였다. 그날 밤 아들을 데리러 온 마루치 금오에게서는 화살과 죽음이 어른거렸다.
연오에 대한 최초의 감정은 그래서 경외심(敬畏心)이었다. 삼족오의 화신을 우러르면서도 그를 에워싼 살기(殺氣)가 두려웠다.
충격적인 반전을 맞은 것은 몇 년 뒤의 일이었다.
어느 날 세오는 약초를 캐러 산에 올라갔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마침 천군이 기도하러 다니던 동굴이 근처에 있었다. 아버지가 출입을 금했지만 비를 피하려고 들어갔다.
그곳에서 문제의 화살을 발견했다.
아마도 바닥에 묻은 것을 짐승이 파헤친 듯했다. 땅에 반쯤 드러나 있었는데 흙을 털어내 보니 광대싸리 화살이었다. 길이는 1척 8촌 남짓, 청석 촉이 섬뜩했다.
구름산에서 마루치의 목을 관통한 것과 같은 화살이 어째서 아버지의 동굴에 있지? 설마 하며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빗속으로 뛰쳐나온 세오의 눈에 동굴 맞은편 수풀이 잡혔다. 협죽도, 거기 협죽도가 우거져 있었다.
초목의 용도에 밝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사냥용 화살촉에 바르는 독을 협죽도 잎에서 채취한다.
다리에 힘이 풀린 소녀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바람이 거세게 일면서 스산한 환영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수풀에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협죽도 아래서, 처연한 눈빛을 보낸다. 연오의 아버지, 금오였다. 오싹한 기운에 세오는 꼼짝할 수 없었다.
주룩주룩 비가 쏟아졌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무거운 죄업을 짊어지고 세오는 외로이 남겨진 연오를 연민했다. 보기만 해도 애틋하고 안타까웠다.
마루치의 죽음으로 임시 군장을 맡게 된 준오는 능수능란하게 부족을 이끌었다. 사로국과 화친을 맺어 근오지에 안정을 가져왔다. 외국 상인들을 적극 유치하여 번영을 일구었다.
부족민들은 천군을 찬양했다. 그는 읍성에 천군당을 세우고 장로와 전사들을 회유했다. 천군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강성해졌다.
반면 후계자의 입지는 눈에 띄게 좁아졌다. 까마귀철막의 대장장이들이 마루치의 아들을 옹호했지만 열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연오가 마루치의 비결을 얻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천군 준오를 추종하는 자들은 후계자를 대놓고 깎아내렸다. 비결도 얻지 못했는데 무슨 마루치냐고 떠들어댔다.
보이지 않는 손이 후계자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형국이다. 자진해서 마루치 자리를 포기하라는 정치적 압력이다.
연오는 그러나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다. 철막에서 밤낮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자기 자신을 벼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