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남산 기슭 소도에 남겨진 천군의 옛 거처였다. 뒤편에 산벚나무 숲을 병풍처럼 두른 다섯 칸 초옥이다.
지붕에 얹은 갈대가 듬성듬성하고 처마도 조금 기울었으나 폐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거처는 옮겼지만 세오가 드나들며 정갈하게 손본 것이다.
마당 한 구석은 꽃과 약초를 재배하는 텃밭이다. 옆에는 항아리 여러 개가 땅속에 반쯤 묻혀 있다. 세오는 거기에 술과 장 등속을 담가 먹는다.
부엌과 곳간은 비었지만 안방은 그녀가 쓰고 있다. 방 아랫목에는 꽃무늬 돗자리가 깔렸고, 윗목에는 오동나무 서안이 놓였다.
바람벽에 붙여둔 책장에는 죽간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리고 툇마루에는 옷감을 짜는 베틀이 덩그러니 자리했다.
연오는 10년 전 이 집에서 세오와 처음 만났다.
그날 소년은 까마귀 한 마리를 쫓아 산벚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눈부신 햇빛 속에서 부리를 딱딱거리며 머리 위를 맴돌던 녀석이다.
까마귀는 숲에서 가장 큰 나무에 앉아 꼿꼿한 자세로 연오를 내려다보았다. 깃털에 윤기가 흐르고 행동거지에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연오는 까마귀를 붙잡고 싶었다. 홀린 듯이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태산이가 위험하다고, 그만 내려오라고, 고함을 질러댔지만 소용없었다.
홀연 이명(耳鳴)이 귓속을 울리고 흐릿한 빛이 가물가물 명멸했다. 까마귀가 태양을 향해 퍼덕퍼덕 날아올랐고, 소년은 허공을 휘저으며 나무에서 떨어졌다.
눈을 떴을 때는 장지 너머로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밤이었다. 연오는 낯선 방에 누워있었다. 천군의 초옥이었다.
문득 하얀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깜짝 놀라 반몸을 일으키는데 쓰라린 통증이 엄습하였다.
예쁜 계집아이가 연오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천군의 외동딸 세오였다.
그날 소녀는 집에 있다가 태산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숲에 들어가 보니 나무에서 떨어진 연오가 혼절해 있었다.
다행히 태산이 몸으로 받아 치명적인 부상은 피했다. 자잘하게 까지거나 긁힌 상처들뿐이었다.
그날 밤 초옥에는 연오와 세오, 둘뿐이었다.
천군 준오가 남산 중턱의 동굴에 기도하러 간 날이었다. 부인도 치성을 도우려고 동행하였다. 혼자 집을 보던 세오가 연오를 데려와 치료한 것이다.
태산이는 소식을 알리러 마루치에게 가고 없었다.
세오는 산기슭에서 나고 자라 초목의 쓰임에 밝았다. 화피(樺皮), 산벚나무의 가지 껍질을 달여 약수를 직접 만들었다.
눈썰미와 손재주도 어려서부터 좋았다. 세심한 손길로 상처 부위를 해독하여 덧나지 않도록 하였다.
소년은 연모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하얀 얼굴로 사뿐사뿐 다가와 총명한 눈빛을 반짝거리며 보드랍게 상처를 어루만지는 미소녀.
그날 밤 세오는 어여쁜 달님이 되어 연오의 가슴에 두근두근 떠올랐다.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