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까막골의 경사

by 권경률

큰까막골의 봄날은 겹경사로 들썩였다.


부족의 기린아 연오와 세오가 스무 살을 맞아 혼례를 치른다. 혼인과 함께 연오는 근오지의 마루치(군장)가 될 예정이다. 그가 전대 마루치 금오의 하나뿐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금오는 10년 전 이웃한 사로국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싸움에는 이겼으나 적의 암습에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로국은 시조 혁거세 때 진한연맹의 맹주로 발돋움하더니, 4대 탈해이사금이 철기를 혁신하여 더욱 강성해졌다.


5대 파사이사금은 좌충우돌하며 인근 소국들을 정복했다. 음즙벌국, 실직곡국, 압독국,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 등을 무력으로 병합한 것이다.


정복전의 성패는 철제 무기가 갈랐다. 사로국은 까마귀철막을 호시탐탐 넘보았다. 삼한의 명품을 손에 넣고자 한 것이다.


침공할 트집을 잡기 위해 진한 맹주는 무리한 공물을 요구했다. 마루치 금오가 단호히 거부하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일으켰다.


금오는 구름산 골짜기에 전사들을 매복시키고 큰까막골로 들어서는 사로국 군대를 기습했다.


계곡 위쪽에서 난데없이 쏟아져 내려온 복병에 적들은 혼비백산했다. 대오의 옆구리가 터지면서 전열이 무너졌다. 근오지 전사들은 날렵하게 포위망을 짜고 배가 넘는 적군을 섬멸했다.


그러나 전사들이 승리의 기쁨에 들떠 환호성을 지를 때 예기치 않은 비극이 일어났다. 수풀이 무성한 골짜기에서 별안간 화살이 날아와 금오의 목을 꿰뚫은 것이다.


길이가 1척 8촌쯤 되는 호시(楛矢), 광대싸리 화살이었다. 화살촉으로 쓴 청석(靑石)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마루치는 큰까막골로 옮겨졌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금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연오의 손을 차마 놓지 못했다. 태어나면서 어미를 잃고 아비의 품에서 자란 아이다. 열 살배기 후계자를 두고 어찌 눈을 감을까.


믿기지 않는 아버지의 죽음에 어린 아들은 눈물바람으로 매달리다가 까무러치고 말았다.


후계자 연오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족은 천군(天君) 준오의 통솔을 받기로 했다. 큰까막골의 제사장이자 세오의 아버지다.


사로국의 위협 속에 그는 신중하게 근오지를 이끌었다. 구름산 요새의 수비 병력을 강화하면서도 사로국에 사절을 보내 화친을 꾀하였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때때로 사로국에서 시비를 걸어 애간장을 태우긴 했지만 그럭저럭 무탈한 나날이었다.


이제 연오는 동갑내기 세오와 혼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근오지의 마루치가 된다. 큰까막골 장로회가 연초에 내린 결정이다.


중대사를 며칠 앞두고 까마귀철막 옆 마루치의 치소(治所)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의식에 쓸 기물을 닦으랴, 휘장과 의복을 손보랴, 술과 식재료를 장만하랴, 손발들이 분주했다.


철막에서 돌아오자마자 연오는 유모에게 등 떠밀려 다시 집을 나서야 했다.


“도련님, 여기서 걸리적거리지 말고 어른들께 인사라도 다녀오세요.”


말은 까칠하게 해도 달래 유모는 누구보다 연오를 아꼈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와 황망하게 떠난 아버지 대신 유모가 키우다시피 하였으니 애틋한 마음이 오죽할까.


단, 후계자가 나태하거나 경솔하게 굴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혼냈다. 마루치가 되어 부족을 이끌 몸이다. 잘못된 처신은 엄하게 꾸짖어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연오는 어린 시절 달래 유모의 친아들 태산이와 함께 어부들의 배에서 가자미 서리를 하다가 걸린 적이 있었다.


유모는 그 매운 손으로 회초리를 들었다. 도련님과 아들이 눈물 콧물 쏙 뺄 만큼 종아리를 모질게 후려쳤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어부들의 집에 찾아갔다. 달래 유모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사죄했고 도련님은 잘못을 깊이 뉘우쳤다.


가자미는 어부의 밥줄이다. 부족민의 생업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잊을 수 없는 따끔하고 간곡한 가르침이었다.


유모네 식구들은 연오에게는 고맙고 듬직하고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남편 몽돌 아재는 전대 마루치 금오를 곁에서 보필하던 부하이자 벗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후계자에게 그는 철막의 모든 것을 전수하고 있다.


아들 태산은 어려서부터 연오와 죽이 잘 맞았다. 우직하고 순박한 성품은 몽돌 아재를 빼다 박았는데 덩치가 곰 같고 힘이 천하장사다.


어린 후계자를 따뜻하게 감싸며 그들은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부모 잃은 소년의 뻥 뚫린 가슴을 푸근한 정으로 채워준 가족이다. 연오의 사람들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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