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관 석벌휴

by 권경률

근오지 천군 준오는 왜의 상인들을 객사로 안내하고 내실에 들어갔다.


천반선 상인들은 천군이 베푼 환영연에서 흠뻑 취하여 잠자리에 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까마귀철막에 데려가 철정을 거래하는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내실에는 특별한 손님이 먼저 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김새가 독특한 사내다. 툭 불거진 눈에 두꺼비 같은 인상이다. 허리에는 5척(115cm) 길이의 고리자루검을 찼다. 칼자루 끝의 둥근 고리에는 구름 문양을 넣었다.


잘 아는 사람인 듯 준오는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넸다.


“자네로군. 대신관께선 무탈하신가?”


“천군을 뵈오이다. 주인님은 거사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계십니다.”


“고맙네. 이제 정말 며칠 안 남았어.”


준오가 자리를 권하여 맞은편에 앉힌 이는 사로국 아찬 귀섬이었다.


서라벌 최강의 칼잡이이자 대신관 석벌휴의 충복으로 알려진 자가 어째서 큰까막골 천군의 내실을 찾았을까?


천군 준오는 오래 전부터 사로국과 내통하고 있었다.


그는 마루치 밑에서 2인자 노릇이나 하는 게 성에 차지 않았다. 사로국의 힘을 빌려 1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어쩌면 시기심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금오와는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고 공부하던 친구 사이였다. 능력도, 자질도 자신이 더 뛰어난데 단지 마루치 혈통이라는 이유로 금오가 부족을 다스리는 것이 언제부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루치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무참한 살의는 사로국의 실력자 석벌휴를 만나면서 솟구쳐 올랐다. 15년 전 가을걷이를 마치고 하늘굿을 위해 진한연맹 천군들이 모두 모였을 때다.


벌휴는 탈해이사금의 손자로 연맹의 대신관을 맡고 있었다.


신력으로는 진한에서 으뜸이었다. 소 발굽으로 점쳐 홍수, 가뭄,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알아맞혔다. 또 사람의 마음을 살펴 선량한 자인지, 사악한 자인지 꿰뚫어 보았다. 백성들은 그를 성인(聖人)이라고 부르며 칭송하였다.


석벌휴는 이따금 준오를 사로국 신궁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진한의 명사가 초청하는 자리를 출세욕에 사로잡힌 자가 마다할 리 없었다.


“이 신궁은 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나정(蘿井) 옆의 숲에 세워졌소. 그대는 지금 사로국의 근원에 앉아있는 것이오.”


대신관은 큰까막골에서 온 손님을 깍듯이 예우하며 표정을 살폈다.


“이거 영광이군요. 유서 깊은 곳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혁거세거서간은 정말 알에서 태어났습니까?”


사로국의 신화적 인물에게 준오가 흥미를 보였다. 석벌휴는 은밀한 목소리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임금의 탄생을 하늘에 고하는 의식입니다. 동방에서 하늘의 뜻을 지상의 인간에게 전하는 것은 신성한 새입니다. 그대 부족이 섬기는 삼족오도 그렇지요. 하늘이 내린 임금은 그래서 새처럼 알에서 나와야 합니다. 난생(卵生)을 춤과 노래로 형용하여 제사를 올린 것이지요.”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건국 신화의 뒷이야기다. 준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서라벌의 사로 6촌은 한(漢)무제의 침공으로 조선이 패망하자(기원전 108) 그 유민들이 남하하여 정착한 곳이다.


그들은 마한을 거쳐 진한으로 들어왔다. 진한 땅에는 이미 또 다른 이주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진(秦)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기원전 221) 삼한으로 건너온 망국의 유민들도 진한 각지에 뿌리를 내렸다.


이주민과 토착민이 어우러져 작은 나라들이 생겨났다. 대개 철기와 기마술을 들여온 이주 세력이 지배층을 이루었다.


사로 6촌도 조선 유민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기로 하고 혁거세를 임금으로 뽑았다(기원전 57).

성씨는 조선의 ‘단군(檀君)’을 가리키는 ‘박달나무 임금’, ‘밝은 임금’에서 따와 ‘박(朴)’이라고 하였다.


“대신관님이 속한 석씨 일족은 동쪽 바다를 건너와 진한에 이르렀지요?”


사로국 비사에 빠져든 준오가 이번에는 석벌휴의 씨족을 거론하였다.


“내 할아버지 탈해이사금은 본래 용성국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용성국(龍城國)은 왜에서 동북쪽으로 1천 리 떨어진 섬나라지요. ‘탈해(脫解)’는 ‘알을 깨고 나온 자’라는 뜻입니다.”


탈해이사금의 내력을 밝히는 대신관의 얼굴에 자부심이 듬뿍 담겼다.


“그럼 조부님도 혁거세처럼 하늘의 뜻을 품고 알에서 나신 거로군요.”


“하하, 할아버지는 조금 다릅니다. 용성국은 해룡(海龍)을 수신(水神)으로 섬기며 바다를 주름잡는 나라라고 합니다. 왕자가 태어나면 용의 자식으로 간주하여 알을 깨고 나오는 의식을 거행한답니다.”


“왕자인데 어찌하여 용성국을 떠나셨습니까?”


“할아버지는 외국 출신 왕비의 소생이었습니다. 용성국에는 ‘용왕(龍王)’이라 일컫는 28명의 족장이 있었는데, 다른 왕비와 왕자들은 거의 다 그들의 핏줄이었지요. 외국인 왕비의 아들이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이자 용왕들은 경계했습니다. 임금 자리를 넘볼까 봐 국왕에게 쫓아내라고 요구했지요.”


석벌휴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준오에게 흉금을 터놓고 혈족의 숨겨진 내력을 밝혔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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