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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Sep 30. 2023

종손, 차례 없는 추석을 처음 맞이하다.

  나는 경주(慶州) 최씨(崔氏) 충렬공파(忠烈公派) 34대손 종손이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시조이고, 35대손 「범죄와의 전쟁」에 나오는 최익현(최민식)이 아들벌이다. 최형배(하정우)는 39대손이니 고조를 넘어가 나로서는 계산이 안된다.


  우리 집에서 족보는 중요했다. 초등학교 시절, 동아대백과사전 옆에는 까만색 양장본의 족보가 수두룩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족보만큼 제사 또한 중요했다. 그 시절 어머니는 5대까지 총 10번의 기제사를 모시고, 2번의 명절과 1번을 추가로 모셨다. 왜 홀수냐고 했더니, 할머니 한 분이 더 계셨단다. 그래서 일 년에 13번을.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3대로 줄여, 8번만 제사를 지내서 다행이라고 했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랬던 우리 집이 올해 차례상을 펴지 않고 추석을 보냈다.


  사실, 지난 추석에도 차례상은 펴지 않았다. 아니 펴지 못했다. 아버지가 간에 낭종이 커지는 바람에 수술을 하시고, 추석연휴 기간에 2주간 입원을 하시는 바람에 할 수 없었다. 병상에서 아버지는 차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셨을 게다. 게다가 평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냈던 차례였으니.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니셨다. 과장으로 한창 일할 시기, 뉴저지에 있는 지사로 갈 기회가 있었다. 가고 싶었다고 하셨지만 가지 못했다고 하셨다. 제사 때문이었다. 조상을 모셔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 기회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아쉬우셨나 보다. 속내를 잘 얘기하지 않으시는 분인데도, 종종 ‘그때 갔어야 했는데…’ 란 말을 한 두어 번 하셨다. 그때 갔었더라면, 딱 크리티컬 에이지인 나는 바이링구얼로 ‘영어를 모국어처럼 썼었을 텐데. 그리고 쓸데없이 영어과외비나 토익학원비 따윈 들지 않았을 텐데’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해본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던 것 같다. 학교를 일주일 빠져도 된다고 좋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국장도 아닌데 할아버지는 7일장을 했었다. 병풍뒤에 할아버지의 시체가 누워 있고, 꽃상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으며, 팔이 떨어져라 두 시간 넘게 영정사진을 들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묘소까지, 꽃상여 맨 앞에서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야~ 디야~”를 종소리와 함께 라이브로 들었던 기억도 났다.


  중학교 때 마지막으로 아버지랑 같이 시제에 갔던 기억이 있다. 수십 명의 모시 한복을 입은 사람들. 갓을 쓰고 흰 수염이 난 할아버지들이 나에게 “아이고, 아재 오셨습니까?”라고 존대를 하고 인사를 했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 종손인 나는 수많은 그 아재들을 뒤로하고, 제단 맨 앞에서 전교 어린이 회장처럼 절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들이 썼던 갓을 나도 쓰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읽으라고 시킨 아버지 만의 글씨체로 써져 있던 무언가를 시제 특유의 톤으로 읽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일천구배액팔십입팔십팔녀언…”


  그랬다. 우리 집은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는. 매년 시제를 지내려 경남 합천으로 내려가셨다. 시제는 24 세손인 최치원부터 시작하여,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까지 약 열 번의 기 제사를 연속으로 지내는 것이었다. 아버지 돈으로 만들어진 사당에서. 그리고 매년 시제에 드는 비용은 약 500만 원. 돼지 몇 마리를 잡고, 집성촌의 할아버지들에게 몇만 원씩 건네드리고. 그건 모두 종손의 몫이었다. 경주 최부자집은 12대를 갔다고 하지만, 우리 가문은 아버지대에서 시작하고 끝났다. 더 이상 그 비용을 댈 수 없어서였다. 아버지가 시제에 마지막으로 가신건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94년이었다. 그 뒤론 갈 수 없었다.


  어린 시절, 큰집인 우리 집의 명절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아버지의 4형제와 고모, 그리고 사촌들까지 25켤레가 넘는 신발을 위해 따로 가족별로 비닐봉지를 준비하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그때를 그리워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추석인 오늘에 들었다. 아버지가 기 제사와 차례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며칠 전에 하셨다. 더 이상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는 뜻에서였다. 어머니가 거들었다. “우리가 그냥 죽어버리면 너한테 부담이 되잖아. 우리가 다 정리하고 가야지.”


  제사를 지내거나 차례를 지낼 땐, 아버지는 지방을 직접 쓰셨다. 내가 중학교 때까지는 무릎을 꿇고 직접 먹을 갈기도 했다. 그 뒤로 아버지는 붓펜이라는 신문물을 받아들이셨다. 내가 여름학기에 박사학위를 받은 2014년의 추석에 아버지는 지방을 쓰시다 “네 지방은 박사로 써질 거야”라고 하시면서 뿌듯해하시던 그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올해 추석, 오늘, 아버지의 크나큰 아쉬움이 느껴졌다. 평생을 바쳐온 그 무엇이 사라진 느낌.

앞으론, 내가 아버지를 위해 현고학생부군신위(現考學生府君神位) 지방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나는 내 자식에게 현고박사부군신위(現考博士府君神位)를 받을 기회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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