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빼고 덜어내기 -마음 편
가깝지만 먼 나라, 독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적 교과과정을 거친다면 모두 배우기 때문이다. 재미없고 정직한 나라,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아는 나라, 맥주와 소시지의 나라, 축구에 진심인 나라, 옥토버페스트, 베를린 장벽. 물론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독일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알고는 있다고..
내가 독일에 빠져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독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2019년 7월 무더웠던 여름날, 바이올린 특강을 진행하러 오신 독일인 선생님을 만났다. 설렘은 잠시였고 독일어도 모르고 독일의 문화도 몰랐던 나는 상대방에게 어떤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독일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당황스러웠고, 흥미로웠다.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게 독일에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그 짝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고, 그 해 겨울 독일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2019년 12월, 코로나19의 습격으로 그 계획이 무산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어느덧 2022년 12월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독일에 서 있었다!
프롤로그를 보고 넘어왔다면, 기차표 사건을 전부 아시리라. 우리 부부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공항에 도착했다. 다행히 추가 연착은 없었고 우리는 무사히 뮌헨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하마터면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공항에서 노숙을 할 수도 있다는 끔찍한 생각이 사라졌다. 정신이 돌아오니 목도 말랐다. 게다가 기차를 타고 3시간을 이동해야 해서 물을 하나 사기로 했다. 일단 주변을 둘러보니 편의점으로 보이는 곳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짐을 끌고 그곳으로 이동했다. 처음 만나는 현지 독일어에 조금 두근거림도 동반한 채. 나는 일반 물과 탄산수를 구분해서 사야 한다는 것쯤은 숙지하고 왔기에 자신 있게 음료코너 앞에 섰다. 물은 Wasser(바써), 마시는 물은 ohne Gas(오네 가스)라고 배우고 왔는데, 뭔가 이상하다. 물이 생각보다 굉장히 다양하고 Still(슈틸), Kohlensäure(한국어표기가 어려워서 패스) 등 다른 단어로 적혀있는 것이다.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나의 무력함에 자존감이 쭉쭉 떨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가 물조차 고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콜라가 더 싼데?"
신랑이 옆으로 다가와 콜라와 물의 가격을 비교하며 말했다. 어라, 이게 바로 천상의 소리인가?
"그래? 그럼 콜라를 사는 게 이득이네!"
빠르게 콜라를 선택하는 것에 동의했다. 절대 내가 어떤 물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서가 아니다. 콜라는 신랑이 좋아하기도 하고, 당 떨어질 때 마셔도 좋고.. 뭐 그런 이유에서다.
두 번째 관문은 계산대였다. 피곤에 쩌든 동양인이 흐릿한 눈동자로 콜라를 들고 서있으니, 직원분이 꽤나 안쓰러워 보였는지 친절하게 계산해 주셨다. 마지막에 Have a nice evening이라는 인사도 잊지 않으셨다. 물론 긴장한 나에겐 영어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얼핏 그렇게 말했다고 짐작해 본다. 나는 분명히 독일어를 공부했는데,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음에 너무 부끄러웠다. 머릿속에서 다양한 독일어들이 지나가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그리고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야 뒤늦게 '아, 이렇게 말해야 했어!'라며 다음엔 꼭 독일어로 말하리라 다짐했다.
콜라를 사서 뮌헨행 기차에 올라탄 우리 부부는 짐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세 시간만 더 가면 거의 도착이라는 생각에 기뻤다. 얼른 검표원이 와서 표를 보여주고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던 검표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효용이 사라진 기차표와 힘들게 다시 구매한 기차표(게다가 비쌌다!)가 다시 한번 아른거렸다.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표를 사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나쁜 생각이 들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고, 우리 부부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한 것이다.
뮌헨 중앙역에서 내린 우리는 이제 지하철을 타야 했다. 우리의 아파트는 U5호선 Neupelach Zentrum(너이펠라흐 첸트룸-독일어 발음이 특이하지만 최선을 다해보았다) 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힘겹게 도착한 동네는 바닥이 축축하고 여기저기 녹은 흔적이 역력한 눈이 보였다. 여기도 눈이 왔었던 모양이다. 질척하게 녹은 눈을 밟으며, 조용한 독일의 거리를 캐리어 바퀴소리로 메우며 아파트로 빠르게 이동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우리는 겨우 체크인을 마치고 아파트 로비를 지나 긴 복도를 지나 제일 끝에 위치한 호수에 멈춰 섰다.
111호
반갑다 우리 집. 한 달 동안 잘 부탁해!
드디어 독일 생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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