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가 어렵다고?(18)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는 말은 아직 김수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얼굴”은 “너”의 표현형이지 “너” 자체는 아닙니다. “너”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오직 “얼굴”을 통해서만 우리 현실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너”에게 “얼굴”을 부여하는 것은 “너”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언어입니다.
3연에서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이라고 할 때, 지금 김수영의 하늘은 맑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맑지 않던 하늘이 활짝 열린 것은 김수영 자신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4‧19혁명을 통해서이죠. 지금은 고인이 된 최하림 시인은 『김수영 평전』에서 “「사령(死靈)」을 씀으로써 김수영은 사실상 4·19를 맞을 내면의 준비를 끝마치고 있는 셈이 된다”고 했지만, 사실은 「사랑」을 씀으로써 “4·19를 맞을 내면의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사랑의 변주곡」을 김수영이 쓴 혁명시의 최종점이라고 보는 입장인데요, 왜냐하면 혁명이라는 것이 일회성 봉기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진리에, 짧지 않은 방황과 모색을 통해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혁명 직전에 ‘사랑’을 말했다가, 다시 여러 우회로를 거쳐 도달한 세계도 ‘사랑’이라는 점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김수영의 ‘사랑’에는 이런 깊이가 있습니다.
“너”를 통해서 사랑을 배웠지만 뒤집어 읽으면 “너”를 사랑함으로써만 사랑은 내게 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만 사랑을 배울 수 있고 사랑을 배울 수 있을 때만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너로 해서” 배운 사랑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 폭포수처럼 쏟아진 것이 4‧19혁명 직후의 시들인데, 사랑을 잃게 한 것은 5‧16쿠데타였죠.
훗날 다시 이 사랑을 변주한 노래를 장엄하게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에서 「사랑의 변주곡」 사이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일들을 점검하지 않고는 「사랑의 변주곡」을 읽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변주곡」을 읽을 때 즈음에는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는 아직 김수영의 ‘사랑’이 불안하다는 것, 하지만 혁명을 맞을 내면의 준비를 점점 갖춰 가고 있다는 것만 짚어두기로 하지요.
그런데 「사랑」은 급작스럽게 써진 시가 아닙니다. 제가 「동야(凍夜)」에서 회복의 기미가 보인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미스터 리에게」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1959년에 탈고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생활에 대한 그간의 부정적 인식이 서서히 걷히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생활을 아는 자”가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이 생활이라는 것이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2연)에 이어서 3연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생활을 아는 자는/ 태양 아래에서/ 생활을 차던진다”. 그러고 나서 중요한 발언을 합니다. “문명에 대항하는 비결은/ 당신 자신이 문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비판이 곧 창조여야 한다는 진리를 져버린 채 살았습니다. 비판은 단지 비교에서 평하거나 반대하거나 미워하거나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고, 세칭 대안은 없어도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외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비판에게 창조의 역량이 없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자 비판이라는 것이 점점 무기력한 물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오직 비판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뭐가 비판이고 뭐가 비판받아야 하는 것인지 그 척도 자체가 흔들린 것이죠.
비판이 창조가 되지 못했던 시간의 후과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지도 모르죠. 비판에서 언어가 강력하게 발휘되는 것인데 비판이 무기력해졌다면 그것은 오늘날 언어가 크게 훼손되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엄밀히 말하면 언어가 훼손됐다기보다는 언어가 소비재로 전락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언어가 어쩌다 소비재가 되었나, 그 역사적 기원을 가만히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중요한 문제를 가만히 돌아본다고 될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더 깊은 탐구는 역량이 되는 이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돌아보자는 말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발맞춰 언어가 그 본질 성격을 잃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힘입은 대중 매체의 폭발적 증가와 맞물려 언어가 소비재가 된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최근의 경험으로는 디지털 기술 때문인데요, 지금 회자되고 있는 인공지능은 우리의 언어를 어디까지 추락시킬지 그게 걱정입니다.
창조는 비판 속에 본래 잠재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앞에서 대안이라고 말했지만, 대안이 먼저 있어서 비판이 가능한 것이 아니고 비판을 통해서만 대안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비판은 단순한 반대가 아닙니다. 비판을 하는 데에는 비판자의 마음에서 살아 있는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어야 하면서 비판을 통해 이것이 점점 명료해지는 동시에 이 무언가도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변화하죠.
만일 자기 안의 무언가는 변하지 않고 비판의 대상더러 변하라고 계속 다그친다면 결국 자기 자신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실제로 현실을 가만히 보면요, 우리가 비판하는 대상은 본래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섣불리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신의 리비도를 집중하다 보면 결국 자신의 변화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 안의 그 무언가에도 병색이 돌면서 비판의 대상과 자신의 무언가 사이의 차이는 미미해지고 유사성은 커집니다.
혁명을 외치다 돌연 반혁명의 진영으로 투항하는 것은 대체로 이런 과정을 밟아서인 것 같습니다. 언어의 소비재 문제와 겹치는 것이기도 한데요, 결국 어떤 비판가들은 현실의 변화를 꾀했던 게 아니라 언어를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충족했던 것이죠. 바뀌지 않는 현실일수록 쟁기 날이 깊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애초에 밭을 갈 마음이 없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밭을 탓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좀더 편해 보이는 옆 밭으로 가 버리죠. 거기가 소출이 좋아 보이니까요.
저는 이것을 ‘비판의 함정’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요, 김수영을 읽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김수영은 비판의 대상이 변화하지 않는 와중에도 자신의 변화를 부단히 밀고 나갔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혁명은 아무 때나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혁명이 오는 ‘때’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오로지 역사 안에 그 ‘때’는 은닉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역사적 사고를 하고 역사적 상상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 ‘때’를 알아맞출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미와 징후를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는 있겠지요.
혁명가들은 그 감지를 통해 혁명을 추구하기도 한 게 우리가 배운 역사이기도 합니다만, 그 추구가 혁명을 불러오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죽임을 당하기 일쑤지요. 혁명의 징후를 감지하려는 노력과 실천 없이 허구한 날 혁명을 부르짖는 일도 병통입니다. 또 혁명의 징후라는 것이 그렇게 족집게처럼 감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혁명의 징후가 감지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는, 겸손하게 자기 자신이 변화를 꾀하는 게 가장 치열한 일입니다. 김수영처럼요. 저는 지난번 책에서 이 시기의 김수영의 변화를 일러, ‘혁명적 존재-되기’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김수영이 “문명에 대항하는 비결은/ 당신 자신이 문명이 되는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창조의 역량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창조의 역량에 “싹이 트고” 있는 징후로 저는 읽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문명이 되는” 일에 김수영이 여기서 일회성으로 발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참 뒤에 쓴 「꽃잎」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순자”라는 “열네 살 우리 집에 고용을 살러 온” 소녀를 통해 “네가 물리친 썩은 문명의 두께/ 멀고도 가까운 그 어마어마한 낭비/ 그 낭비에 대항한다고 소모한/ 그 몇 갑절의 투자”……. 이 진술에서 우리는 김수영이 그동안 보여줬던 시적 쟁투가 혁명을 넘어, 요즘 회자되는 개벽의 수준까지 향하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미스터 리에게」와 「사랑」을 통해 드디어 ‘혁명적 존재’를 향한 시동을 걸어놓은 셈인데, 그러자마자 실제 혁명이 일어났고, 5‧16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오로지 혁명을 상상하며 시를 쓸 수 있었던 것도 혁명 직전의 그의 내적 열망이 아주 깊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다음 시간에 자세히 읽어 보겠지만 5‧16쿠데타 이후의 좌절과 방황도 그 열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반증하는 실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그가 생활을 제대로 긍정할 수 있으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김수영의 문명에 대한 인식이 성격이 무엇인지 힌트를 주는 글 한 편이 1955년에 이미 써졌습니다. 1955년 1월 26일 자 연합신문에 발표한 글인데 제목은 「생명의 향수를 찾아―화가 고갱을 생각하고」입니다. 여기서 김수영은 “처자와 가족과 문명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생명과 휴식을 찾아서 타이티로 떠난” 화가 고갱에 대한 이야기를 빌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을 언급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전쟁에 대한 독특한 시각은 이 글에서 재차 나타납니다. 자신은 고갱이 왜 타이티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절실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6‧25 이후의 일”이었는데, 전쟁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우리 민족에게 지각과 긍지를 넣어 준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고 합니다. 현실은 “서울의 태반이 폐허”이고 “우리의 정신에도 많은 폐허가 생겼고 그것이 아직도 완전한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도피 심리와 역경을 넘어서고자 하는 초인에 가까운 정신을 동시에 읽을 수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가 섞여 있는 상태죠.
김수영은 고갱의 시대와 자신의 시대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생명의 향수를 그리고 고민하면서 일체의 허위와 문명의 폐단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고귀한 정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1,2차 세계대전 “전후에 세계는 전전(戰前)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고 어지럽게 되었으면 되었지 조금도 단순하고 선량하게 되지는 못하였다”는 사실도 잊지 않습니다.
“문명에 대항하는 비결은/ 당신 자신이 문명이 되는 것이다”라는 「미스터 리에게」의 진술에서 1955년 산문을 끌어오는 것이 얼마나 적절한가라는 물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도리어 시로 표현되지 않은 산문적인 현실 인식을 엿봄으로써 시를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는 입장이고, 특히 김수영의 경우 현실에 대한 고민을 시종 놓치지 않은 시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튼 이 산문에서 김수영이 꿈꾸는 문명이 무엇인가는 이미 제출된 바 그대로입니다. “생명의 향수”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일체의 허위와 문명의 폐단을 싫어하고 미워하는”이 그것입니다. 다소 소박하지만 1960년대 후반에 도달한 문명에 대한 입장은 이미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죠.
중요한 것은 “검은 파도 소리”에 대한 그리움도 그리움이지만, 결국 그러한 생명의 문화를 자신이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서러워하지 않을 것이지만 여하튼 죽는 날까지 칠전팔기하며 싸우고 또 싸워 가야 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같다”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꺾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 ‘꺾이지 않는 마음’도 사실 우리가 시를 읽으면서 내내 강조한 것이지요. 그것을 김수영 자신의 말대로 자신의 속마음이 은폐되지 않는 산문에서 새삼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 김수영의 이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시를 읽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산문의 곳곳에서 시의 기저를 이루는 인식과 꿈이 확인되고는 합니다. 제가 이번 강의에서 산문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김수영의 문학은 시와 산문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채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산문에 대한 독서와 이해만 충실해도 정신 어지러운 ‘김수영 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김수영의 꿈은 일반적인 생각들보다 심원합니다. 이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김수영의 ‘혁명’에 올바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