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가 어렵다고?(7)
“달나라의 장난”이 나를 울리고는 있지만, 그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죠? “이 집 주인”이 뚱뚱했던 모양입니다. 뚱뚱한 신체는 아무래도 여유와 경제적 부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뚱뚱하다는 것은 비만이라는 정신적, 신체적 병리 현상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비만’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으로 불리고는 했잖습니까? 그런 사람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어느 소설보다 신기로운 나의 생활” 때문에 팽이가 돌면서 연출하는 “달나라의 장난” 따위에 울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달나라의 장난”은 “별세계” 같다는 것으로 한 번, 그리고 “나를 울린다”로 한 번 표현됩니다. “별세계”는 나보다 ‘여유 있는 생활’과 연결되면서 자신의 처지를 회피하고자 선택하는 화자의 심리적 상태를 암시하고, 후자는 그것이 결국 자기 설움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산문적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아무 지향도 없이 살아가자니 시의 화자의 마음에는 설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와는 대비되어 풍요롭게 사는 “집 주인” 즉 “뚱뚱한 주인” 같은 삶이 있습니다. 그 집에 손님으로 와 보니 그 집 아이가 팽이를 돌리는데, 그것을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보니, 즉 아무리 냉철하게 봐도 “달나라의 장난”처럼 “별세계”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팽이는 돌면서 자신을 울립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너무 서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은 이렇게 비교되어 나타나는 설움이 싫습니다.
“나”는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던 ‘자기 극복’에 대한 자의식을 이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내는데, 문제는 이 자의식이 일회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 의지는 앞으로 김수영의 시를 읽는 데 아주 중요한 바탕으로 삼을 만합니다. 그리고 이 자기 극복 의지는 단순하게 김수영 개인의 수양과 고양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사는 현실, 즉 자신이 처한 역사적 조건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와 한몸이 됩니다.
김수영의 시에 비상한 생동감과 힘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 조건을 넘어서고자 하는 ‘바람’으로 인한 것입니다. 개인의 수양과 고양에 머물렀다면 그의 시는 한없이 정적이었을 겁니다. 김수영의 시 전편을 읽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독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의 ‘좋은 시’들은 대부분 개인의 문제와 역사의 문제를 한몸으로 삼은 것들이며,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 생동감과 힘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항간에는 김수영의 시가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그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가 크게 다르지 않아서라고들 합니다만,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김수영 당시의 이른바 ‘참여시’도 마찬가지로 살아남아 있어야 합니다.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 이런 실천적인 의미로만 읽으면 일면적인 접근이 됩니다.
참여시에 대한 김수영 특유의 통찰은 1960년대 중반에 가서 드러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내용과 형식, 사실 이 두 개념은 조금 진부한 면이 없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합니다. 내용과 형식 문제는 아마 그가 죽기 전에 쓴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를 일별하면서 다시 다룰 겁니다. 사실 산문이기는 하지만 「시여, 침을 뱉어라」는 아주 깊이 독해할 필요가 있는 문건입니다. 이 글은 말년의 김수영의 시론이기도 하지만,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그동안 시를 써오면서 깨달았던 진실들의 집대성이기도 합니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시의 화자는 말합니다. 나는 그러한 사람이기에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오만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치기어린 다짐으로 읽어야 하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팽이는 여전히 돕니다. 어떻게 보면 팽이가 도는 것도 김수영에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죠. 직접적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으로서의 현실일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돕니까?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돌고 있지요? 이 대목에서 어떤 분들은 「공자의 생활난」을 다시 호출하며 “수천 년 전의 성인”이 공자라고 봅니다. 그래서 팽이가 변함없이 도는 것을 김수영의 굳건한 정신으로 읽던데 그렇게 읽으면 이 시는 전혀 다른 뜻을 갖게 됩니다. 화자를 서럽게 울리는 팽이가 갑자기 화자의 굳건한 정신이 될 수 있나요? “수천 년 전의 성인”은 앞에서 읽은 “오래 보지 못한”과 조응합니다. 그리고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과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도는 팽이는 의미적으로도 통합니다.
“오래 보지 못한”과 “수천 년 전의 성인”은 지금 김수영의 현재와는 아무 관계 없는 어떤 세계, 존재를 가리킵니다. 김수영은 현재가 되지 못하는 과거의 의미와 전통을 기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래 보지 못한”은 오래전에는 봤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래전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수천 년 전의 성인”의 세계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이건 부정적인 의미도 아니고 긍정적인 의미도 아닙니다. 그냥 객관적 현실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그것들은 다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의탁할 만한 세계가 아닌 거지요. 그래서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울리면서 도는 팽이는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라고요. 이제 우리는 “스스로 도는 힘”과 우리가 함께할 “공통된 그 무엇을” 망실한 것이라고 팽이는 알려주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지금 이렇게 멈추지도 않고 돌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팽이가 돈다”를 두 번 반복합니다. 이 반복은 설움의 확인이면서 “스스로 도는 힘”과 “공통된 그 무엇을” 망실한 현재 사태의 확인입니다. 그리고 작품 전체에서 팽이가 부단히 돌고 있는 느낌을 시적으로 완성해줍니다.
시적 효과를 통해 우리는 작품 전체에서 팽이가 내내 돌고 있는 느낌을 얻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현재의 현실은 그러하지만, 이 작품에서 도드라지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입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김수영이 잃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바람’, 의지입니다. 그리고 이 의지가 현실과 부딪치면서 설움을 증폭시키지만 김수영의 내면에서 긍지의 포도알이 익어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물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팽이가 돌면서 부정하고 있는 것, “스스로 도는 힘”과 “공통된 그 무엇”이 의미하는 것은 무얼까요? 일단 말뜻 그대로 풀어보자면, “스스로 도는 힘”은 일종의 자립, 독립, 단독적인 것 등등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통된 그 무엇”은 “스스로 도는 힘”이 암시하는 개별적인 것을 넘어선 보편적인 것, 통일적인 것, 종합적인 또는 이념적인 것 등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만 읽어도 이 작품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작품의 문맥에서만 보자면, 지금 김수영은 전쟁이나 전쟁이 남긴 폐허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그것에 대해 통곡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그의 산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그는 여린 사람이긴 했지만 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김수영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전쟁의 폐허 위에서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되고 또는 현실에서 번식하고 있는 “달나라의 장난”입니다.
폐허에서 허무주의와 맹랑한 이상주의는 자라기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김수영은 “스스로 도는 힘”과 “공통된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의미를 넘어, 혹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꽃이 열매의 상부에 필 때”(「공자의 생활난」)나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토끼」) 같은 것은 아닐까요?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이냐고 시인에게 물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에게 깊이 내재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