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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골 편지
26화
사할린 아리랑
by
조희
Sep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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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아리랑
조희
시계가 나를 깨운다
눈을 뜨면 브이코프* 공동묘지로 가는 길목
녹슨 회중시계 하나가 눈 속에서
빠꿈이 흰 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고 있다
하마터면 짓밟을 뻔했다
부레를 꿈꾸는 부서진 초침과 시침
녹슨 회중시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머리칼을 쓸어 넘기듯 눈을 털었다
누군가의 호주머니 속에서 살았을 얼굴
지나간 반짝이는 것들을 생각해 보려는데
벌목장에서 나무를 베고 곡괭이가 없으면
맨손으로도 석탄을 캐야 했던
검은 얼굴들과 검은 손톱들이
뚜껑이 닫히지 않는 회중시계 안에서
유령들처럼 어른거렸다
시계는 비문의 은유
어떤 시간을 통과하다 멈춰 버린 것일까
얼룩진 눈길을 한참을 걸어도
공동묘지는 안 보이고
코르샤코프 망향의 언덕을 안고 뛰다가 넘어져
시체 옆에 고장 난 내가 누워 있기도 했다
어느 모퉁이에서는 얼어 죽은
시체가 나를 불렀다
나도 유령이 된 걸까?
눈 위에 뿌리를 쓰고 또 쓰고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은폐된 눈 위의 편지처럼
여전히 눈이 내렸다
헤드라이터를 쓴 그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외눈박이같이
문득 눈 내리는 사할린 벌판이
잠 바깥에 서 있는 나를
세차게 흔들었다
주먹 쥔 손 안에는 녹슨 회중시계가 있고
어디선가 사할린 아리랑이 흘러나오고
시계가 고장 난 나를 깨운다
* 브이코프-사할린 섬에 있었던 대표적인 탄광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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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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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내일을여는작가 신인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가. 작고 사소한 것과 쓸모없는 것들에게 귀 기울이고 있다. 공저 [뭉클했던 날들의 기록], 공저 [종이배에 별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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