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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May 31. 2023

칼과 방패를 모두 내려놓고(빌러비드_토니모리슨)

민음사 세계문학전지 서평 쓰기 11

칼과 방패를 모두 내려놓고,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최인자 옮김. 문학동네 2014     



토니모리슨은 1993년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 위원회는 "환상적인 상상력과 시적 언어를 통해 미국의 사회 문제에 삶을 불어넣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총 11권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그중 『빌러비드』는 작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해 준 대표작이다. 1998년에는 오프라 윈프리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윈프리는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동한 나머지 모리슨과 직접 접촉해 이 소설의 영화제작권을 사들였다고 한다.      


하필 이 아름다운 계절에 『빌러비드』를 읽었다. 슬프게 아름답고 끔찍하게 훌륭한 소설에 흠뻑 빠져 있는 동안 화창한 계절이 어색했다. 단지 가득 핀 마가렛이 예쁜 만큼, 햇살이 따사롭고, 장미가 붉고, 초록이 생생한 만큼 부조화의 감정도 배가되었다. 상점에서 장을 볼 때면 그 마음이 더 부풀었다. 넘쳐나는 식료품과 물건들, 사람들의 세련된 옷차림, 쇼핑몰에 흐르는 보사노바 풍의 음악까지. 평소 편안과 안락을 주던 것들이 죄스럽게 다가왔다.        


『빌러비드』가 독자들에게 특별한 슬픔과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는 작품의 핵심 모티브가 실화라는데 있다. 토니 모리슨은 출판사 랜덤하우스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때 자신이 출간한 『블랙 북』에서 ‘마가렛 가너 사건’을 만난다. 『블랙북』은 논픽션으로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흑인 관련 사건을 기록한 책이다. ‘마가렛 가너’는 흑인 노예였고, 엄마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 살다 붙잡힌 그녀는 주인의 농장으로 아이들을 보내는 대신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다 붙잡힌다.     

 

토니 모리슨은 ‘세서’(마가렛 가너)가 비극적인 일을 저지르기까지 노예로서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 그녀의 삶이 얼마나 가혹했기에 그런 짓을 했는지 증언하고 변호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대신 놀라운 선택을 한다. 발언권조차 없이 살해당한 아이, 이름도 없었던 그 아이를 환생시킨다. 마치 구전동화 속 주인공처럼.

     



이름 없던 그 아이의 묘비명에 새겨진 문구. ‘빌러비드 beloved’ 사랑받아야 했던 그녀는 빌러비드라는 이름으로 환생했다. 그녀가 124번지에 나타난 날, 세서는 양수가 터지는 것을 느낀다. 세서는 알아차린다. 빌러비드가 자신이 죽인 아이라는 것을. 빌러비드는 세서의 사랑을 갈구하고 또 갈구한다. 세서는 모든 것을 해준다. 놀아주고, 꾸며주며 있던 돈을 다 쓰고, 일자리도 포기한다. 세서는 점점 쇠약해지고 빌러비드는 살이 찌고 비대해진다. 어느 날 빌러비드는 세서의 목을 조른다. 자신을 죽인 엄마를 죽이고 싶었을까? 차라리 당신이 죽지 왜 나를 죽였냐고 따지고 싶었을까?     


자신의 아이를 죽인 세서. 그 비극적 결심의 배경을 소설은 자세히 소개한다. 토니모리슨은 참담했던 노예의 삶을 문학의 시선으로 관조한다. 세서의 등에 남겨진 채찍 자국은 커다란 나무로, 사이사이 맺힌 고름은 꽃으로 묘사된다. 재갈이 물린 채 겪은 노예들의 비참함을 수탉의 비웃음으로 증폭시킨다. 닭의 시선으로, 짐승만도 못한 처지의 흑인 노예의 참담함이 서글프게 재현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들은 망각이라 변명하는 입에 재갈을 물린다. 끔찍한 노예제의 역사를 과거에서 현재로 생생하면서도 품격 있게 소환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세서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고심한다. 발이 네 개 달린 짐승 같은 짓을 했다고 비난할 것인가? 모성애로 이해할 것인가? 세서의 가장 큰 잘못은 빌러비드에게 가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 행동은 충분히 나빴지만, 우발적이었다. 빌러비드 다음으로 가장 피해를 보고 아팠을 당사자가 세서라는 점도 정상참작 된다.


그녀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건 덴버에게다. 덴버는 세서의 둘째 딸이다. 세서는 18년간 덴버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기억을 숨겼다. 딸을 의심 속에 가두고 고립시켰다. 그래선 안됐다. 사실을 해명하고 물음표를 제거해줘야 했다. 왜 마을 사람들우리 집을 찾지 않는지, 두 오빠는 왜 도망을 갔는지 대화해야 했다. 자식은 부모의 삶을 모른다. 부모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굶주렸는지, 고통당했는지 알 턱이 없다. 부모가 알려주지 않으면, 자식은 불안에 갇히게 된다. 인생을 망치게 된다.      


실종아동전문기관에서 오래 일한 동료가 한 말이 생각났다. 실종 아동 가정은 두부류로 나뉜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생을 바치는 부모와 아닌 부모. 언뜻 첫 번째 부모가 더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후자라고 했다. 생은 살아남은 사람을 위해 바쳐야 한다. 인정 없고 매몰차서가 아니다. 온 힘을 다해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부모로서 걸어야 할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온 가족이 무너진다. 세서의 가정은 무너졌다. 두 아들은 도망갔고, 덴버는 고립되었다. 그녀는 남아있는 아이들을 위해 이웃에게 도움을 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세서는  베이비 석스의 충고를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칼과 방패, 모두 내려놓아라.’ 베이비 석스의 충고를 단지 인정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실천하고 싶었다.(284)     


 뒤늦었지만, 세서는 칼과 방패를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두 딸의 손을 붙잡고 스케이트를 탔다.   

   

손에 손을 잡고,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그들은 얼음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중략- 소녀들은 깔깔 웃고 비명을 지르며 엄마를 따라 얼음 위로 올라섰다. -중략- 누구 하나가 넘어질 때마다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중략- 여전히 웃느라 가슴이 들썩거리고 눈물까지 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두 손과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웃음이 잦아든 후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빌러비드와 덴버는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세서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286-7)      


『빌러비드』의 진정한 엔딩은 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손을 잡고, 함께 웃고, 추억을 만들면서 그렇게 가족은 어떠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가족으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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