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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Jun 30. 2023

‘과거는 심오하다.’

『미겔 스트리트 』V. S 나이폴/세계문학전집 읽고 서평 쓰기 14

『미겔 스트리트』(Miguel Street, 1959) V. S 나이폴 · 이상옥 옮김. 민음사(2006)


『미겔 스트리트』(Miguel Street, 1959)는 저자 V. S. 나이폴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이폴은 인도계 부모님에게서 태어났고 일곱 살 무렵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섬 트리니다드로 이주했다. 제목 미겔 스트리트는 트리니다드의 수도 포트 오브 스페인의 한 거리를 지칭한다. (나이폴이 살았던 거리의 실제이름은 루이스 스트리트라고 한다.)      


한림원은 2001년 노벨 문학상 수상의 이유를 ‘엄정하고 면밀한 시각에 통찰력 있는 내러티브를 결합해 억압의 역사를 직시하게 해 준다.’고 밝혔다. 배경지식 없이 『미겔 스트리트』를 즐긴 독자들은 이러한 평가에 의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 속 어디에도 역사적, 인종적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폴은 2001년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  「Two Worlds」에서 이렇게 밝혔다.     

 

I ignored the racial and social complexities of the street. I explained nothing. I stayed at ground level, so to speak. I presented people only as they appeared on the street.  

(나는  그 거리의 인종적,사회적 복합성을 무시했다. 나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지상의 레벨에 머물렀다. 나는 그 거리의 사람들 모습 그대로 보여주었다. )    


소설은 총 17개의 단편이 묶인 연작 소설이다. 각 편마다 마을 주민 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서술된다. 소년인 ‘나’는 화자가 되어 슬럼가 미겔 스트리트의 주민들을 순진무구한 눈으로 관찰한다. 소년의 눈에서 인물과 상황은 희화화되고 때론 미화된다. 가슴 아프고 비극적인 사연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유머 또한 넘친다. 유머는 머나먼 땅에 사는 낯선 인종의 사람이 마치 옆집 사는 아저씨인양 가깝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17편에서는 소년이 그 거리를 떠나게 된 경위를 밝히고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주민들은 비루한 일상을 못난 성격대로 살아가다가(게으름, 폭력적 성향, 불신 또는 맹목적 헌신 등) 각자의 위기상황에 봉착한다. 상황을 돌파하려는 나름의 노력에도 전보다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누구 하나 나아지는 법이 없다. 권태롭게 놀음을 하던 백수 청년 보가트는 포악한 포주가 되어 수감되고, 가정폭력을 일삼던 조지는 부인이 죽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지만 실패하고 회생 불가능 알코올중독자로 짐승만도 못한 삶으로 타락한다. 소년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긍정의 아이콘 해트마저 살인을 저지른다. 각양각색의 파멸 중에서도 엘리아스의 꿈이 좌절되는 모습이 가장 안타까웠다. 그것은 트리니다드의 적나라한 민낯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엘리아스의 아버지 조지는 늘 혼자 투덜대거나 욕을 하고(32) 아내와 딸, 아들을 모두 구타하곤 했다.(34) 엘리아스는 그 덕에 일찍 철이 들었고,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겠다는 야심도 있었다.  


 네가 우리 아버지를 용서해 주어야겠어. (중략) 아버지는 늙었거든. 고생스럽게 일생을 살아왔어. 여기 모인 우리처럼 교육을 받지도 못했어. 게다가 우리 모두처럼 그 또한 영혼은 가지고 있거든.(37)      


사려 깊은 엘리아스는 부모가 물려준 폭력의 유산을 세습하지 않고, 밤낮으로 공부에 매진한다. 집이 술집으로 변하고, 여동생을 미군에게 팔아 넘어에도 눈을 감고 오로지 공부에 매달린다. 그러나 시험에 번번이 낙방한다. 영어가 발목을 잡는다. 이에 대해 부산대학교 이정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미겔 스트리트』의 작중인물 중 엘리아스는 의사가 되고자 하지만 자신의 영어실력 즉, 영문학(literature)과 시(Poetry) 때문에 관직으로 나아가는 시험에 번번이 실패한다. 엘리아스와 주민들은 리터러쳐(literature)를 리트리트처(litritcher)로 포이트리(poetry)를 폴트리(poultry)로 발음하면서 제국주의적 억압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언어에 의해 혐오스러운 존재 즉, 주변화 된다. 엘리아스는 영국이 주관하는 캠브리지 고등학교 자격시험을 치러야만 전문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실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지만 “언어가 권력의 계층구조를 영속시키는 매개”로 작동하기에 그의 억울함의 호소는 이곳에서 무의미할 뿐이다. - 이정민 영어영문학연구 제56권 4호(2014) V.S.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를 제국의 수사학으로 읽기  


   

한편, 주인공 화자인 ‘나’는 엘리아스와 늘 비교되는 아이였다.     


나의 어머니는 늘 내게 말하곤 했다. “넌 왜 엘리아스를 본받지 않니? 하느님께서 너 같은 애를 왜 내게 점지하셨는지 모르겠다.”(53)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보듯 그렇게 한심한 아이는 아니었다. 엘리아스는 책상 앞에 앉아 공부에 골몰했지만, ‘나’는 온 동네 사람과 사귀며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쌓고 있었다. 특히, 해트와의 우정은 소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해트만큼 인생을 즐기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새롭거나 화려한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매일같이 똑같은 것들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늘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고 있었다. (중략) 내가 미겔 스트리트에서 눈여겨본 것 중의 하나는 개들이 어쩌면 그 주인들을 그처럼 닮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조지는 실쭉하고 야비한 잡종견을 키우고 있었다. 토니의 개는 무시무시하고 야만적이었다. 해트의 개는 내가 알기로는 유머 감각을 갖춘 유일한 셰퍼드였다. (262)

                                                                                    

 그런 해트마저 살인을 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해트가 감옥에 가던 날 나의 일부가 죽어버렸던 것이다.(278)라고 고백하는 소년. 몇 년 후 그가 감옥에서 돌아왔지만 많은 것이 달라져있었다. 순수했던 소년은 세관원으로 성장하지만, 술주정꾼이 되어 난폭해졌다. 따지고 보면 내 잘못도 아니에요. 모두 트리니다드의 책임이죠. 이곳에서는 술이나 마셔야지 그 밖에 할 일이 있겠어요?(281) 소년은 일상뿐만 아니라 정신상태까지 트리니다드를 닮아가고 있었다.      


결국 소년은 미겔스트리트를 떠난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약학과 장학금을 받고 영국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떠나는 날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앞에 놓인 내 자신의 그림자만 내려다보았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장학금을 주었던 선생이 말했듯 소년은 훌륭한 약제사가 되어 다시 미겔스트리트로 돌아왔을까? 나이폴은 다시 트리니다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폭력과 부조리로 가득한 절망과 패배의 땅에 발 딛기 싫었을 것이다. 마치 군대에 다시 가는 느낌 아닐까? 대한민국의 남성들이 훈련소의 첫날을 평생 잊지 못하듯 그도 트리니다드를 잊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기억의 땅에 굴을 파고, 깊숙이 들어갔다. 식민지 역사와 그 이전의 원주민들의 삶을 연구하고 자신의 뿌리 인도를 연구했다.      


작품 속에서 해트만큼이나 깊은 영향을 준 B. 워즈워스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나이폴의 작품세계에 대한 강렬한 메타포를 발견할 수 있다.      


“한 달에 한 줄씩 쓸 뿐이야. 하지만 그것이 훌륭한 한 줄의 시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어.” 나는 물었다. “지난달에 쓰신 그 한 줄의 시는 어떤 것이었나요?” 그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과거는 심오하다’라는 구절이지.” 내가 말했다. “그 참 아름다운 구절이네요.” B.워즈워스가 말했다. “나는 한 달 내내 경험한 내용을 순화하여 한 줄의 시가 되게 한다고. 그러니까 앞으로 이십이 년이면 모든 인류를 상대로 노래할 한 편의 시가 완성될 거야.” 나는 온통 경이로움을 느꼈다. (79)       


과거는 심오하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 속에는 한 사람, 하나의 자아가 있다. 나이폴은 노벨평화상 수상강연에서 프루스트를 인용하며 말한다. "If we would try to understand that particular self, it is by searching our own bosoms, and trying to reconstruct it there, that we may arrive at it.( 만약 우리가 그 특정한 자아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의 가슴에서 찾고 그것을 재구성하려고 하려한다면, 우리는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폴이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자아로 내려가 기억하고 재창조하여 쓴 『미겔 스트리트』는 아주 작은 섬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인류를 상대로 한 노래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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