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 Sep 22. 2023

기억의 메아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모디아노 세계문학 읽고 서평 쓰기 16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2014년)


기억의 메아리


파트릭 모디아노는 1945년 태어났다. 이 해는 인류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해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지점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1945년 9월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다. 80년대 생인 내가 느끼는 전쟁의 감각은 고작 민방위 훈련 경고음 정도이다. 그럼에도 전쟁이 인류에게 남긴 상흔의 깊이는 안다. 문학이라는 세계 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되새겨진다. 지난 학기에 읽은 책들도 그랬다. 윌리엄골딩이 고발하는 인간성의 상실, 베케트의 허무주의, 전쟁 후 스며든 공포와 폭력을 그린 헤르타 뮐러, 모두 대전(大戰)이 선물한 참혹한 경험의 승화이다.      


파트릭 모디아노 역시 그 시기에 천착하여 작품을 썼다. 그의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1943년에 일어난 사건이 핵심으로 전개된다. 배경은 나치가 점령했던 프랑스이다. 프랑스인 아닌 다른 국적의 사람들은 잡혀가는 것으로 보아 2차 세계대전 당시 고초를 겪은 유대인들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기 롤랑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소설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독자는 짧은 고백이 선사한 충격과 여운에 사로잡혀 한 남자의 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그의 이름은 기 롤랑. 진짜 이름이 아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55년 기억상실증을 앓게 되어 자신의 과거가 송두리째 지워지는 아픔을 겪는다. 기억을 되찾기 위해 흥신소에 간 그는 자신과 같이 기억상실을 경험한 탐정 위트의 권유로 흥신소에서 일해 왔다. 그러다 1965년 위트는 돌연 흥신소의 문을 닫고 고향 니스로 떠나고, 기 롤랑은 자신이 잃어버린 과거를 추적하기로 결심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 롤랑은 탐정사무소에서의 경험과 인맥으로 과거를 추적해 간다. 그러다 네 명의 젊은 남녀의 사진을 입수한다. 기 롤랑, 드니즈(여자친구), 프레디(친구), 게이 오를로프(프레디의 부인).  네 남녀는 신분이 확실치 않아 늘 두려움에 쫓긴다. 검문이 심해져 붙잡힐 위기에 처한 그들은 파리에서 벗어나 국경을 넘기로 하고, 1943년 므제브 지역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기 롤랑의 운명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나치의 부역자로 보이는 보브와 브레데라는 낯선 인물들의 꾐에 넘어간 것이다. 기 롤랑은 산속에 혼자 버려진다.      


기억의 조각을 회복해 가는 기 롤랑. 어릴 때부터 친구였기에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을 유일한 생존자 프레디를 찾아 태평양을 건너지만 만나지 못한다. 보름 전 프레디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소식만 접할 뿐이다. 프레디의 부인 게이는 자살했고, 드니즈 행방불명되었다. 기 롤랑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실제 이름으로 강력한 후보 중 하나인 ‘지미 페드로 스테른’이라는 인물에 주목한다. 페드로가 마지막에 거주했던 로마의 부티크 옵스퀴르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를 찾아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렇게 의문들은 해소되지 못한 채, 상실된 기억은 구멍 난 채, 열린 결말로 소설은 끝맺는다.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살아남아 있으리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탐정 소설의 형식을 빌려 마치 객관적 사실들을 기반으로 과거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사실들은 믿을게 못된다. 당시엔 가명을 쓰거나, 가짜여권을 만들고, 위장 결혼을 하는 일이 흔했다. 진실 게임의 또 다른 방해꾼은 망각이다. 기 롤랑은 사람들의 흐릿한 기억들 사이를 헤매며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쏟아내는 내적 독백들은 복잡한 그의 심경을 보여준다.     

 

나는 벌써 나의 삶을 다 살았고 이제는 어느 토요일 저녁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에 불과했다. 무엇 때문에 이미 끊어진 관계를 다시 맺고 오래전부터 막혀버린 통로를 찾으려 애쓴단 말인가?(65P)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 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75P)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금방 꾼 꿈을 되살리기 위하여 붙잡으려 애써도 도무지 잡히지 않는 덧없는 꿈의 조각들처럼(129P) 기억을 되찾으려는 기 롤랑의 노력은 덧없는 것일까? 내 삶의 무엇인가가, 나를 알았던 어떤 사람,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살아남이 있는지도 모른다(251P)는 바람은 헛된 것일까?      


갈색 머리의 남자를 기억하는 세 사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독백이 아니다. 이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이 소설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혈혈단신이 된 기 롤랑이 읊조리는 독백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있다. 그것을 밝히는데 26장, 32장, 43장은 매우 중요하다. 이 세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기 롤랑이 화자이거나 위트와 나눈 편지나 조사보고서이다. 그러나 이 세장의 화자는 각각 다르다. 26장의 화자는 페드로에게 브로치와 다이아몬드를 산 보석상이고, 32장의 화자는 소녀시절 기 롤랑과 드니즈와 함께 소풍을 간 기억이 있는 한 무용학원원장이고, 43장은 드니즈와 페드로와 한동네에 살며 즐거운 저녁식사를 함께 하곤 했던 이제는 중년이 되었을 한 여성이다. 그들은 기 롤랑의 인생에 익명상태의 불과한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파트릭 모디아노는 이들을 화자로 내세워 기억의 조각을 건져 올린 것일까? 거기엔 분명힌 이유가 있다.     


이들은 기 롤랑 혹은 드니즈와 한때 즐거운, 혹은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살해당하고 붙잡혀가는 점령기 프랑스의 참혹한 과거 속에서도 그들은 찰나의 행복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서로를 염려하고 축복한다.      


식사는 매우 즐거웠었다. 그 여자는 드니즈와 페드로가 아주 멋진 쌍을 이룬다고 생각했다.(253P)     


그 여자는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으면 싶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정확하게 이름이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그 모든 세월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차가 대로를 따라 올라가는 동안 그 여자는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194P)       


페드로는 그 뒤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그토록 오래전에 오직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던 그 남자가 이 여름날 저녁, 인도 위에 떨어진 마지막 햇빛의 반점을 뛰어넘고 있는 어린아이와 함께 있는 자신 못지않게 한가하고 행복하기를 바랐다.(181P)   

   

기억의 메아리    

 

21장을 통해 우리는 드니즈와 함께 함께 무개차를 타고 떠났던 그날을 기 롤랑도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베르사유 공원을 산책하던 그날 물 위에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셨고, 드니즈와 소녀가 초록색과 장밋빛의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것을 기억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웃고 있었던 것도 기억했다. 그리고 그도 그 계집아이는 누구였는지 궁금해한다. 기억의 메아리들이 서로를 향해 울려 퍼지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서로에게 가 닿지 않더라도 말이다.    


인간이란 한 낱 실루엣에 불과한, 유령과 수증기와 같이 곧 사라질 존재일 뿐이라 말하는 기 롤랑의 말은 맞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고, 모래는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는 위트의 통찰력이 담긴 말도 맞다. 그러나 모디아노는 그 실루엣에 불과한, 유령과 수증기와 같이 사라질 모래의 발자국 같은 존재들이 반짝이는 빛의 순간, 그 따뜻한 기억의 시선을 포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인간의 생의 한계이자 진실이기도 하기에 감동으로 다가온다.      


모디아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 준 스웨덴의 한림원은 그는 기억의 예술을 통해 불가해한 인간의 운명을 소환하고 점령기 프랑스의 현실을 드러냈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가 드러낸 점령 시대 프랑스의 현실이란 무엇일까? 수용소에서 인간성의 말살을 경험하거나 역사에 굴복하여 악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사연은 이 책에 등장하지 않는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범하고 힘없는, 무엇보다 외로운 사람들이다. 망각이라는 막을 수 없는 시간 횡포 속에서도 평범했던 만남을 기억하고 축복하는 보석상, 눈부셨던 하루의 행복을 회상하는 발레학원원장이 된 소녀, 저녁식사를 함께 나눴던 이웃집 중년여성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점령 시대 프랑스의 현실이란 이런 사람들을 칭하는 것이라 믿고 싶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인류의 마지막까지 존재하며 우리를 비출 것이다. 시간제한등과 같이 결국은 점멸하여 사라질지라도.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끈질긴 생명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