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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May 27. 2024

인격보다 우위에 있는 기능성

2024.5.25 vs. 서울이랜드 @수원월드컵경기장


지난 부천전의 경기도 직관을 했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글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어떤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4연패와 5연패의 체감은 너무도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라도 연패를 끊는다면 다시 도약하는 분위기로 돌아설 수 있지만 5연패가 된다면 염기훈 감독의 끝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분위기를 나만 느낀 게 아닌 듯 삭발을 하고 나온 선수들이 보였다. 양형모, 이종성, 장호익 등 주로 고참 선수들이다. 염기훈 감독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알 수 없었지만 왠지 함께 삭발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선수들이 입장할 때 N석에는 염기훈 감독의 사퇴를 요구하는 걸개가 여러 개 보였다. 선수와 감독,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든 관중들이 마지막 경고와 같은 그 문구들을 보았을 것이다. 수원이 이 경기를 승리한다면 6위에서 2위로 단숨에 올라설 수 있다. 그만큼 모두에게 중요한 경기였다.


복합적인 기대감 속에서 시작된 경기는 딱히 이전과 달라진 게 보이지 않았다. 수원의 공격은 느리고 단조로웠고 상대의 공격은 빠르고 간결했다. 김주찬이 오른쪽에 배치될 때 김주찬은 잘 보이지 않는다. 뮬리치는 여전히 공중볼을 따내지 못했고 그다지 열정도 없어 보였다.


그나마 열심히 뛰는 모습이 돋보였던 툰가라로부터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속도 있는 드리블로 중원에 진입한 뒤 전방으로 패스를 찔러 넣었다. 손석용이 바로 슛을 시도할 줄 알았지만 옆쪽에 있는 뮬리치에게 패스를 했다. 약간 놀라운 광경이었다. 뮬리치의 골터치가 깔끔하지 않았음에도 위치가 너무 좋았기에 쉽게 골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터지는 골이자 경기를 앞서가는 선제골이었다.


후반전에 들어가면서 수원의 공격은 더 견고해졌다. 뮬리치와 툰가라의 골 점유율이 늘어나면서 날카로운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찬스들이 여러 번 만들어지면서 5월의 첫 승리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결정적인 찬스에서 두 번이나 골대를 맞히는 일이 벌어지면서 나는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골을 넣지 못하면 경기가 쉽게 뒤집힐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불안은 바로 현실로 이어졌다. 골대를 맞혔던 수원의 불운과는 다르게 서울이랜드는 크로스로 올린 볼이 골대 구석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승부로는 팬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골을 먹은 시점부터 점점 분위기는 암울해졌고 이윽고 두 번째 골과 세 번째 골까지 허용했다. 7분이라는 인져리 타임 때 수원의 극장골이 터지길 바랐건만 그 시간에 오히려 두 골이나 허용한 것이다. 가장 중요했던 경기가 가장 처참한 결과로 끝나버렸다.


경기가 끝나자 N석에서는 "염기훈 나가!"라는 구호가 크고 반복적으로 터져 나왔다. 염기훈 나가라는 함성을 듣고 있는 염기훈 감독을 지켜봐야 했다. 선수로서의 염기훈과 감독으로서의 염기훈은 완전히 다른 취급을 받고 있었다. 긴 시간 수원에서 뛰면서 팬들에게 선사했던 이력들은 감독으로서의 기능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존중받지 못했고 개인의 인격 또한 함부로 언급되기 일쑤였다.


수원팬들 중에는 염기훈 감독이 사퇴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고 좀 더 기회를 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두 집단의 마음은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감독을 옹호하는 발언에 강경파들은 공격적이고 모욕을 가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들만이 진정한 팬이라 주장하면서 팬들 사이에 선을 긋는다.


염기훈 감독은 이날 경기가 끝난 뒤 사퇴 의사를 밝혔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끝까지 예의를 갖췄고 진심 어린 사과를 표시했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던 중 어딘가에서 "염기훈 나가!"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욕이나 다름없는 말의 방식이었다. 그런 사람이 같은 팀을 응원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수치스럽다. '염기훈 나가'를 외치던 사람들은 염기훈이 나간다고 하자 그의 응원가를 불렀다. 올해 보는 가장 역겨운 장면이었다. 그 광경을 뒤로하고 염기훈은 눈물을 흘리며 홀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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