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식 05. 안부전화 안하는 핑계를 길게 대는 내향형 인간의 사연
나는 나의 립서비스를 경멸하는 편이다. 직업 특성상 타인의 무언가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고 기운을 북돋기 위해 후천적으로 노력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의 립서비스를 경멸한다. 그것은 언제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별안간 무슨 소리냐고?
가족의 신조는 그대로 멈춰라
우선 선천적으로 긴장을 잘하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립서비스에 능숙하지 못하다. 무엇이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남들이 못 알아차리는 은근한 유머가 있긴 하다)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나와 형제들은 목석의 기운을 받고 자라났다.
무언가를 잘한다는 칭찬은커녕 어떤 결과물이나 사물에 관해 느낌을 말하는 것이 다소 금기시돼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매사 자식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규율을 만드신 적은 없었으나 그들 역시 늘 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하기를 주저했고, 담백히 말하자면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시종일관 식사 자리에서 말이 없던 아버지와 사위의 대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젊은 시절에 무얼 즐겨 하셨냐는 사위의 질문에 그는 눈빛이 돌변한다. 이십 대 시절 집중했던 운동 종목에 관해 매우 급한 어조로 답변하기 시작한다.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모든 문장에서 ‘봉’만 들릴 지경이다.
‘조금만 천천히 대답해도 될 텐데…’ 싶다가도 홍조를 띈 채 군대 시절부터 훈련받느라 매번 들었던 어마한 무게의 통나무(아니 그런 걸 왜 시키지…), 한국 날다람쥐를 몽골까지 보낼 만큼의 단련된 근육을 철봉 위에서 연마했던 청년 시절 그의 즐거움이 폭죽을 터트린다. 그리하여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립서비스를 마무리한다. 사위는 그날 ‘봉’이라는 단어밖에 듣지 못했다(아버지는 '봉체조의 달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누군가 물어보면 박카스 열 병쯤 마신 것 같은 타우린 중독 수준으로 말하는 버릇은 나에게도 이어졌다. 경상도식으로 말하면 ‘주둥이에 발통 달렸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제 열렬히 관심 가는 주제에 관한 질문을 누군가 건네도 많이 말할 체력이 소진되었긴 하다(TMI).
(아 그냥 다들 그린벨트지역의 고요한 돌멩이처럼 각자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다.)
얼마 전 두통이 심해 찾아간 신경외과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입을 굳게 다물지 말고 ‘아’ 하고 입을 몇 초간 벌리고 있으라는 말을 듣고 우리 가족의 표정을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콧물같이 다정하고 억울한 얼굴 그리고 목석의 기운은 내가 남쪽으로 상경하면서도 소리소문없이 따라온 것이다. 참고로 나는 우리 가족을 매우 싫어하고 사랑한다.
부서지기 쉬운 마음, 알아서 보존하세요
애증하는 집안의 성향을 물려받은 걸 이렇게 싫어하면서도(어쩌면 집안과 무관한 나의 성향일지도 모른다) 립서비스를 경멸하는 이유는 언어가 가진 파급력 때문이라고 손쉽게 항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저 내가 뱉은 언어에 대한 조심성 때문인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타인에게 언어를 전할 때 거울효과가 늘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의 반응에 반사되어 내가 겪는 부침을 매번 걱정하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폭력적이지 않기 위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은 나의 경우에 한해서는 위선이거나 거짓에 가깝다. 그저 나는 내가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쏘아 올린 작은 공이 그의 마음 거울에 부딪혀 파편이 튀어오를 때 나는 그를 감당할 재간이 되는가. 어떤 사태를 겪을 때 그가 겪는 감정에 깊이 빙의되면서 저절로 진이 빠지는 이유는 그 상황에 처한 나에게 깊이 매혹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진심으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집에 가면 달콤하게 녹은 팝콘처럼 잘도 까먹으면서 말이다.
이따금 당신은 타인 지향적인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매우 ‘기브 앤 테이크형 인간’에 가깝다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애초에 나는 나의 이야기에 골몰하는 편이며, 분위기에 신경 쓰는 편이며, 이따금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머릿속은 묘한 구름으로 몽롱해진다. ("아이고 많이 아팠겠다" 말하면서 '집에 가서 냉채족발 먹어야지' 생각한다). 나는 당신의 ‘마음거울’ 파편을 방패막이를 들어 올려 나의 근육을 쓸 수고를 하지 않기 위해 언어에 조심성을 가질 뿐이다. 그래서 립서비스를 매번 경계한다. 그것은 매우 힘이 센 도끼이므로.
스스로 립서비스를 칼날로 치부하는 필자는 이따금 나 아닌 듯한 말투로 (주로 직장생활을 하며) 타인의 자존감을 올리는 멘트를 칠 때 약간의 번아웃을 겪는다. 사랑하면 그냥 같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이렇게까지 표현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주 보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고, 간혹 보는 사람과 마주할 때는 코를 조금 더 킁킁거리게 된다. "자 나를 봐주세요. 봐달라고! 우리 사랑하자고!"
밥 먹었는지 똥은 쌌는지 잘 잤는지 맥락을 알 수 없는 조크를 던진다. 애당초 언어 센스가 있는 사람들은 흥을 잘 돋고 나는 그런 유머는 없으니 그것을 파괴하는 헛소리를 구사한다. 그것이 아무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나만의 립서비스다. 맥락 없음. 나아가, 누군가 쫓아오는 듯한 어조로 몰아치듯 말하는 가족의 깨진 '마음 거울'을 늘 들여다본다. 거기에 내 얼굴도 무럭 솟아나 있다. "아버지, 우리의 언어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디다."
단 하나의 철칙은 평가 대신 코딱지 파기
립서비스 공부에 이처럼 빈약한 걸 고백하면서도 화장한 얼굴(페르소나를 쓴 얼굴로)로 아첨을 할 때 조심하는 한 가지는 있다. 적어도 타인의 기운을 북돋는 언어를 쓸 때 평가하는 말을 쓰지 않고자 한다. ‘예쁘다’라는 말의 반대말은 ‘못생겼다’이고, ‘저 사람은 배울 게 많다’라는 말의 반대말은 ‘저 사람은 배울 게 없다’가 되므로, 누군가의 능력을 판단하는 말은 지양하려고 한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부침을 겪고 파도를 넘어왔는지 묻기보다 그 이전의 시간들에 집중하는 버릇을 들였다. 가령 언제부터 공산당을 싫어했는지 코를 파고 어디에 묻혔는지 생각해보는 식이다. 우리의 대화 방향이 언제나 불쏘시개 오리였으면 좋겠다.
<경향신문> 김보미 기자는 그의 책 <슬기로운 언어생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맞춤법 검사에서 오류는 나오지 않았어도 타인을 아프게 하고 차별하는 언어라면 그것은 틀린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문법이 정확해도 일부러 누군가가 알아듣지 못하게 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말이라면 화려한 어휘를 동원해 아무리 솜씨 좋게 말해도 잘못된 언어지요.”
솜털 같은 세계와 다정으로 살기 위해 화려한 립서비스 안에 숨은 이면을 언제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너머에 언제나 사랑받고 싶어하는 가족과 나의 얼굴이 보인다. 그 얼굴이 그냥 거기에 있어서 나는 그것을 계속 바라보기로 한다. 아버지, 이제 운동 못해서 어떻해요. 하지만 안부 전화를 안 할랍니다.
거울을 들지 않아도 좋은, 양지바른 일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