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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아이들 Jun 11. 2023

내 몸에 꼭 맞는 여행

두리안 05. 혼자 하는 여행

마음 둘 데 없는 사람들은 떠난다. 바닷가에 앉아 한참을 바라본다.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보다 시끄럽게 움직이는 파도를 보며, 잠시나마 머릿속을 비운다.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후미진 골목과 간판 글자가 지워진 식당, 쿰쿰한 민박집으로 떠돈다. 길 위에서 위로를 얻고 새로운 인연도 만난다. 여행 끝에 사람들은 한결 가볍게 돌아간다.


혼자 떠난 여행은 낭만적이라는 환상.


대학 졸업 후 제주도로 떠났다. 혼자 떠난 첫 여행이다.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대여섯 시간씩 걸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바닷바람을 오래 쐐 머리카락은 떡지고 이마는 뜨끈뜨근했다. 우연을 가장해 찾아간 작은 식당에서는 간이 짜서 물을 몇 잔이나 들이켰다. 낭만을 감당하기 버거운 날이었다. 민박집에 들어서고야 깨달았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무언가 버리기 위해 온 게 아니라는 걸. 암만 바다를 마주 보고 걸어도 거기 내던질 고민 따위 없다는 걸. 잠금쇠가 고장 난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중요한 건 하나였다. ‘화장실이 떨어져 있군, 여기서는 물을 작작 마셔야겠어.’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곯아떨어졌다.


혼자 떠난 여행은 낭만적이라는 환상.

혼자 떠난 여행이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실상.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처럼 여행을 하면,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다. 세상 경직된 얼굴로 세상의 모든 근심을 짊어진 사람의 표정을 짓는 일. 이런 일이 영 어색하다면 적당히 포기하고 타협하고 기웃거려 보기도 해야 한다.


여러 차례의 여행 끝에, 나는 편의점뷰 숙소에서 잠을 청한다. '뭐 하러 왔나' 싶을 정도로 방에 틀어박혀 드라마를 정주행 하기도 하고,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순두부찌개 정식을 먹는다. 숙소에 비치된 방명록만 보더라도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있고 전혀 다른, 그러니까 ‘누군가’ 같은 사람들도 있다.


몸에 꼭 는 옷을 찾듯 몸에 꼭 맞는 여행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환상과 실상은 다르지만, 그래도 환상은 필요하다. 누군가를 따라 하다 보면 그게 내 몸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알게 되거든.


결국 여행은 남긴다.

카드 이용대금 명세서와 얼룩덜룩 그을린 피부. 그리고 약간의 피곤함.

나는 이런 실상이 몸에 꼭 맞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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