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식 06. 월요일 연차를 쓴 어느 직장인의 고집불통 거울 치료법
자기 전에 월요일에 입을 바지와 티셔츠를 꺼내 놓았다. 업무 수첩과 해야 할 업무 목록을 잠깐 복기하는 것으로 자기 전 미션을 클리어했다. 가을 무렵 이사를 갈 예정이기에 각기 다른 부동산 앱 세 개를 탐색해가며 관심 목록에 전세 매물을 찜해놨다. ‘여긴 엘리베이터도 없으면서 관리비를 오만 원이나 받아먹다니.’ 이 순간에는 궁시렁의 대가다.
집 안 청소를 마쳤고 오아시스 앱으로 반려자와 함께 먹을 일주일치 식량도 주문했다. 찌찌와 개코(필자가 키우는 고양이 이름)의 사료, 화장실을 넉넉히 채울 모래도 결제했다. 이번주 금요일에는 주관해야 할 오프라인 회의가 있고, 곧 다른 모임의 온라인 회의를 소집해야 하고, 전세자금 대출 연기를 위해 은행도 가야 한다. 그러려면 경영지원팀에 요청해서 서류도 몇 개 떼야 한다.
주말에 가족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원고를 써야 한다. 쉽게 쓰이는 원고라면 좋으련만 뭔가를 철저하게 재독해야 한다. 다른 업무로 읽어야 할 책도 세 권 정도 대기 중이다. 그 외 독촉과 뭔가를 부탁하는 문자는 주말에도 끊이지 않고 온다. 이제 관성이다. 일주일만 잘 버텨보자. 올초에 새로 산 수첩의 첫 문장은 “식혜와 요강을 비우는 마음으로 기록한다.”였는데. 왜인지 그 요강에서 오줌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딱히 성실하게 뭔가를 이룬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런 거지?
반쪽짜리 인간의 홀로그램 대화
나는 오늘 연차를 냈다. 식혜를 다시 얼리고 요강을 비우기 위해서다. 제대로 멍때리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롯이 나와 TMI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양이도 반려자도 나발이고 간에 오랜만에 야성의 나를 불러내자. ‘혼자’와 ‘완성’은 서로 궁합이 맞지 않고, 때때로 그것은 아름답다. 그래서 오늘은 미완성인, 반쪽짜리 인간을 드러내며 산성비 내리는 소리를 들어야지. 물론 이것도 솔직하진 않을 수밖에.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쓰기가 될 테니까. 그럼에도 이번 글은 한번쯤 내버려 두는 아무거나 홀로그램 대화다.
혼자 있을 때 가장 못생겨지는 법이고, 나는 그게 또 좋아서 이런 하루를 ‘미완성의 오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못생긴 내가 오늘 해보고 싶은 것들을 다음과 같이 적어본다. 반쪽1, 2로 나를 나누어서 일문일답도 시켜본다. 그것들은 모두 미완성으로 끝나면 더 아름다워지는 것들이다. 목표를 어길 때 목포로 갈 수 있다.
첫째, 세 살의 나에게 찾아가 그럭저럭 인생은 버틸 만하다고 말해준다.
나의 유년 시절은 늘 이 무렵의 오후에 머물러 있는데, 작은 댐 위 물가에서 풀이나 물, 벌레를 보며 놀곤 했다. 이사가 잦았다. 당시 나는 똥도 오줌도 원활하게 잘 쌌는데 시원하게 우는 법은 몰랐던 것 같다. 도시로 거처를 옮긴 다음에는 똥도 못 싸서 소아과에 여러 번 간 일이 있다. 그 후로 나는 말하기보다 쓰기를 좋아하는 인간으로 거듭났지만. 의뭉스럽게 오후에 외로움을 느꼈던, 앞으로의 파도에 휘청거릴 어린 시절 나를 위해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다. 사연 많은 꼬맹이야, 홈런볼 많이 사줄게.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
반쪽1(이상향에 가까운 나) 너는 똥구멍 말고 숨구멍도 있단다. 호흡 지금부터 천천히 해보자.
반쪽2(현실의 나) 갈 수가 없다. 그냥 거기서 계속 외로워해라. 아프니까 세 살이고, 외로움도 꽤 근사한 감정인 것 같다.
둘째, 아버지한테 연락 한 통 드리자고 나의 내면에게‘만’ 호소해본다.
끔찍하도록(정말 끔찍하게!) 아버지를 사랑하는데, 일 년에 단 두어 번 정도 연락드린다. 이제 일흔이 다 되어가시는 아버지를 종종 떠올리며, 이렇게 사랑하면서도 표현을 안 하다가 그냥 그렇게 다들 가겠지 싶어진다. 그래서 늘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속으로만 한다. 그래서 오늘 거울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좀체 챙기지 않는 나에게 말을 걸어 보도록 한다. 효녀로 살아야지 그렇고 말고.
반쪽1 아버지한테 연락 한 통 드려라. 너는 아버지와 가장 닮은 얼굴의, 당신도 고백한 가족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이지 않느냐.
반쪽2 그냥 아픈 손가락으로 있을란다. 아버지는 담배를 끊으셨지만 제가 이어서 태우고 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유전 아닐까요. 우리는 쪈내로 이어져 있어요, 아버지. 지난 글에도 나오셨던 것 같네요.
셋째, 다양성에 반하는 혐오 발언을 혐오하는 네 자신은 한 번도 혐오한 적 없다. 네 얼굴만 가장 잘났지?
단정 짓거나 결론 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이건 역사가 좀 있어서 차후 지면에서 자세히 다뤄야겠다.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때 해결사처럼 말하거나 깊이 있는 통찰로 심금을 울리는 사람보다 그 순간 윙크를 하거나 긴장의 고삐를 풀어주는 개그맨을 좋아한다. 법륜스님처럼 출가하지 않은 한 타인의 조언은 늘 조언에 끝난다고 믿는 편인 네가 정작 내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손쉽게 혐오했다. ‘튀는 사람’을 이따금 경멸했다. 어디 좀 반성 좀 하자.
반쪽1 언제나 용기 있는 사람을 사랑하다고 말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꼰대가 되어 가고 있다, 너는.
반쪽2 다양성을 머리로만 배워서 그래. 입시교육의 현실을 미워해버리자. 그러니 여전히 자기애로 똘똘 뭉치며 혀를 길게 내밀면 된다. 스스로도 어느 순간 알 거야. 내 혀가 언제 이렇게 길었지? 하고.
넷째, 예쁘다는 말 안 쓰기로 했는데 너무 많이 써버렸다. 나 오늘은 그냥 솔직해질까?
어린아이한테 이 말을 할 때 가지는 폭력성을 책으로 많이 익혔다. 계속 예쁘기 위해 자신을 단장할 임무와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가치를 평가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머리로는 익혔지만 ‘못생겼다’, ‘잘생겼다’, ‘미남이다’, ‘예쁘다’ 등등을 남발하면서 <인어공주>가 흑인이어서 보지 않겠다는 사람을 이해하지 않으려 들었다. 네가 다양성을 인지하는 삶의 맥락에는 어떤 다양함이 도대체 있는 걸까? 다양성을 인지하지 않는 사람을 손쉽게 미워하고 구별하는 와중에, 너야말로 정상 궤도의 삶을 꿈꾸고 있진 않았니?
반쪽1 방귀 같은 말만 하면서 방귀 안 꿨다고 너 성질 냈지?
반쪽2 응. 연탄채 함부로 찼다는 거, 지금은 인정할 수 있어. 내가 뱉는 언어는 완전하지 않아.
다섯째, 사랑하는 장르가 멀어지고 있다. 그건 사하라에만 있는 게 아닌 건 누구보다 알 텐데.
열네 살 무렵부터 연애시를 썼던 것 같다. 고등학교 문예부에 죽치고 앉아 장부(당시 문예부 전통은 사장님이 쓸 법한 두꺼운 장부에 시를 쓰는 것이었다)에 꽤 많은 습작을 했다. 그 이후의 행로는 대다수 비슷해서 생략하지만, 가장 창조적이었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언어를 갈고 닦는 최고의 공부가 시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 시 이야기를 하면 간지러워하고 매우 다른 분야라고 내치는 너의 속마음엔 그것을 한때 너무 사랑했던 시절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아시스가 아니라 코웨이정수기에서 흐르는 마음일텐데. 냉수 조절도 가능하고, 새벽에 밝게 빛나기도 하고. 쪼르르륵.
반쪽1 시는 가끔 너의 반려자가 쓰는 삼성 갤럭시 노트에도 있고, 카피를 갈고 닦는 친구의 업무용 PPT에도 있고, 김동률 노래를 반박자씩 느리게 부르는 친구의 목울대에 있음을 까먹지 말자. 네가 못생김과 미완성을 사랑하는 이유가 각기 다른 방식의 운율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왔음을 두고두고 기억해야 그 녀석도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깐. 운율에게도 안부가 있어.
반쪽2 운율이란 무엇일까. 나는 계속 출렁일 수 있을까. 나 돼지 막창 먹고 싶어.
음... 가장 야성의 욕망이 튀어나왔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목포로 갈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