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양념 고수다. 참기름, 소금, 간장만 있으면 어떤 나물이든 다 무친다. 나물이야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지만, 고기나 생선은 입에도 안 대면서 귀신 같이 간을 맞춘다. 불고기든 돼지고기 김치찌개든 생선조림이든 간을 보지 않고 눈대중으로 양념한다는 뜻이다. 계량은 또 어떻고. "이거 어떻게 만들어?" 하면 "간장 쬐금, 소금 한 꼬집, 고춧가루 살짝, 참기름 쪼르륵" 하는 식의 대답을 한다. 엄마에 대해 많은 면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또 새롭다. 지극히 주관적인, 양념에 통달한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다.
다른 사람은 어떻고. 당장 텔레비전을 틀어도 매일 새벽 가게 불을 밝히는 <생활의 달인>이 나온다.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면 "그냥 매일매일" 한다고 답한다. 나는 이들을 '매일의 은둔고수'라고 일컫는다. 고수 아닌 은둔고수라고 칭할 수 있는 건 '자연스럽고' '자랑하지 않고' '그래서 더 멋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알아채기 어렵다. 자신이 고수인 것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고 말이지.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따금 주인공의 단골 식당 사장님이 나온다.
기쁠 때는 기쁜 대로, 슬플 때는 슬픈 대로 말벗이 돼주고 가끔 핀잔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고민을 토로하는 주인공에게 사장님은 세상 단순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해답을 내준다. 놀랍게도, 주인공의 인생은 바뀐다. 빙 둘러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길에 지름길이 있었던 거다. 보통은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마음을 바꾼다. 이런 사장님들을 나는 '거리조절의 고수'라고 일컫는다. 적당히 정신 차리도록 애정 어린 잔소리를 퍼부어주는 사람들이다.
은둔고수는 대단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꽃보다 남자> 금잔디가 아르바이트하던 죽집 사장님처럼. 수염 난 수더분한 사장님이 알고 보니 전 청와대 셰프였다는 설정이다. 시간이 지나 보니 공감할 만한 스토리가 없었다. 말 그대로 공감이다.
이제 조금은 알겠다. 은둔고수는 공감할 만한 구석이 하나쯤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
뭐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대단하게 여기는 내 마음도 있다는 거.
세상 사람의 반은 은둔고수인 게 틀림없고, 그중의 하나는 나일 거라는 생각도 필요할 거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