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4편
한 권의 책에는 황금 같은 문장들이 여럿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제와 내용을 중심으로 독후감을 정리하다 보면, 몇몇 문장들은 언급되지 못한 채 사라지곤 합니다. <독후감>을 통해 줄거리와 몇 가지 주제에 대해 다뤄보았다면, <책 속 문장> 시리즈에서는 빛나는 문장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것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고자 합니다. 문장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의미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작품의 줄거리나 주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내가 인상 깊게 보았던 문장들을 기록하고,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와 저의 생각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오웰의 사회주의를 이해하자면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필독서다 (옳긴이의 말 )
이 책은 오웰이 가진 특수한 삶의 흔적과 당대 유럽의 혼란한 정세를 토대로 쓰였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1984>나 <동물농장>에 비해선 덜 알려진 책이지만, 그가 사회주의를 추구하게 된 이유와 그가 추구하는 사회정의가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오웰의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의 다른 작품을 완전히 흡수하기 위해선, 이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 줄거리 소개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이 책의 1부에서는 직접 광부들의 삶에 뛰어들어 느꼈던 하층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회의 하층민에 주목하고, 그들의 삶이 지닌 고통을 이해하면서 오웰의 사회주의는 비로소 온전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2부에서 유럽을 뒤흔드는 파시즘의 파도와 그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의 역할을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사회주의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가 생각하는 올바른 사회주의의 방향을 제언합니다. 이 책은 곧 그의 사상적 토대이며, 이를 이해하고 보면 기존의 작품에서도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47,48p)
오웰은 거친 광부들의 작업을 직접 경험하며, 그들이 행하는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역설합니다. 그 가치는 영국 사회의 대부분이 석탄을 통해 운영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회의 하층민으로서 모두에게 무시받는 광부들이 없었다면, 찬란한 영국 문명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희미한 램프 빛에 의존하는 세상이 있기에, 찬란한 영국 제국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단지 무시하고 경멸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던 노동 계층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서, 오웰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계층 의식을 타파하고, 모든 계층을 위한 사회 정의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것은 노동 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67p)
그가 작품에서 꾸준히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는 영국 사회의 뿌리 깊은 계층 의식입니다. 이는 비단 귀족층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 시민 계층을 넘어 하층 계급에까지 존재합니다. 모든 계층은 자신보다 낮은 대상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혐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같은 사람조차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에 대한 존중은커녕 그것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위 계층이 경제력이나 권력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침범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는 듯 보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꽤나 중요합니다. 상위 계층이 하위 대상에 혐오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위 계층의 사람들 스스로가 그러한 차별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노동 계층의 경우 불편함과 냉대를 타파하기보다는, 상위 계층의 명령에 따라 '처신'하기에 바쁩니다. 하위 계층 스스로 지니는 노예의식은 계층 갈등을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 한데 노동 계급과 정말 가까워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나중에 더 이야기해야 할 테지만, 여기선 가능하지 않다는 내 생각만 밝혀두기로 한다. (154p)
결국 이 책의 핵심 질문이자, 오웰이 추구하는 사회의 방향은 최하층 계급인 노동자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는 사회의 각 계층이 서로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지지적인 분위기 속에 협동하는 것을 추구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하위 계급에게 애정을 가지는 것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오웰은 책의 2부에서 노동자와 가까워지는 것이 불가능한 구체적 이유를 지적하며, 사회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엄청난 희생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 그들은 '평민'이니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소년 시절의 나에게, 그리고 나 같은 집안에서 자란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 '평민'은 거의 인간 이하의 존재였다. (169p) +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중산층 사람들이 노동 계급은 더럽다고 '믿는'데 있다. 아울러 더 문제인 것은 아무튼 노동자는 '본래부터' 더러운 존재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176p)
사회의 구성원은 교육과 문화 작용을 통해 해당 사회에 적합한 신념과 정체성을 구성합니다. 상급 학교에서 공부했던 오웰은 자신의 학창 시절이 학창 시절 때는 평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했음을 지적합니다. 마찬가지로 평민 계층은 노동 계급에 대한 본질적인 혐오감과 무시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과 가까워지려는 시도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합니다.
여기서 오웰이 지적하는 문제는 그러한 차별이 단순한 무지나 무관심이 아니라, 신체적인 혐오감에 기인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과는 친구가 될 수 있지만, 더럽고 냄새나서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이들과는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중산층이 노동자들에게 느끼는 거부감이라는 것은 더럽고 거친 하층 세계에 대한 자연스러운 혐오감입니다. 그들에게 신체적, 생리적 공포를 느끼게 되는 순간 그것은 이해와 배려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느껴지는 거부감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뛰어들 용기가 없다면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 나는 모든 권위에 반항적이었다. (..) 내 자신을 막연히 사회주의자로 정의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정말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고, 노동 계급이 인간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189p)
영국 사회주의자들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는 한 대목입니다. 자칭 '사회주의자'라고 하는 이들에게 사회주의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지지 기반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익 추구 활동에 가장 적합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오웰 스스로도 사회주의자가 되고자 했던 이유가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심을 표출하기 위함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자칭 사회주의자 대부분이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않으면서 본인을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이유 탓에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여전히 깊은 계층 의식에 따라 행동하고, 영국 제국의 지배자적 의식을 옹호합니다. 겉으로는 노동 계급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주장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들의 사회 진출을 적극적으로 막았던 것이 당대 영국의 '사회주의자'였습니다.
■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 (201p)
영국의 명문학교 이튼 스쿨을 졸업한 오웰이 계층 차별의식을 타파하려는 선봉에 섰다는 것은 꽤나 특이한 일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오웰이 권력관계에 대한 민감성을 지니고 있었고, 삶에서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역할을 모두 경험했다는 특수한 맥락이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버마에서 경찰로 5년간 근무하며 지배자의 역할에서 권력관계가 가진 모순점과 자신에게 복종해야 하는 버마인들의 처지에 주목합니다. 권력관계에 따라 지배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며, 지배의식에 탈출하고자 합니다.
그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지배를 반대하고, 관계에서의 권력관계가 아닌 동등함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피지배인의 삶에 어려움과 고통이, 사회적인 의의와 중요성이 있음을 깨달으며 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를 노동 계급의 세계로 안내했고, 그에게 압제자가 아닌 피지배자의 입장을 알려주었습니다.
■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212p) + 좌파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반제국주의자다. 그러나 영국인치고 대영 제국이 해체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214p)
앞서 설명했던, 당대 사회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욕망 달성을 위한 사회주의 추구'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누구보다 개혁의 중심이 되어야 했던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는 감시자가 사라지는 것 정도로 인식되었을 뿐, 사회적 정의나 평등에 대해서는 어떤 동기도 전해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회주의는 주로 상류층과 중산층의 사상이 되었고, 그들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계급적 차별과 권력 지배 관계를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계급 타파를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히려 그것이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덕분입니다. 그들은 단지 사회주의자인 척하며, 의미 없는 평등을 외쳤을 뿐, '진정한 사회주의'를 추구한 이는 없었다.
■ 계급적 특권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은밀한 속물근성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취향과 편견도 억눌러야 한다. 나를 철저히 변화시켜야 하며, 결국엔 같은 사람인 줄 모를 정도로 달라져야 한다.(217p)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번거롭게 자신의 습성과 이데올로기를 바꾸지 않고도 계급 차별을 철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218p)
오웰은 사회 속에서 형성된 계급적 특권 의식과 혐오 의식을 해결하기 위해선, 신념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의 완전한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많은 이들이 쉽게 이야기하듯이, 본래의 습성이나 신념 체계의 탈바꿈 없이 계급 차별을 철폐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취향과 편견을 억누르고, 스스로 노동자의 삶으로 뛰어들어야 비로소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오웰은 기존의 계층이 결코 노동의식과 가까워질 수 없다고 예측한 것이다.
■ 이제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회주의가 하나의 세계 체제로 제대로 적용되기만 한다면 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 사회주의는 너무나 초보적인 상식이기 때문에, 나는 이따금 사회주의가 아직도 자리를 못 잡은 게 이상해서 놀라곤 한다. (229p)
사회주의에 대한 오웰의 강한 애정과 신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적어도 오웰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다른 개인적 목적으로 추구되지 않았다. 그가 추구했던 사회주의는 사실 억압을 강화하는 정통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성을 강조한 '민주적 사회주의'였다. 하위 계급에 대해 깊은 애정을 담고 있던 그는 민주 사회주의가 경제적,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시선에서 사회주의는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으면서도,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사회주의가 '너무나 초보적인 상식'으로 여겨졌으며, 그것을 당연한 답으로 생각했다.
■ 정말 안타까운 것은 사회주의가 대체로 기계적 진보라는 관념과 결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55p) + 유감스러운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보라는 말과 사회주의라는 말이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기계를 혐오하는 부류의 사람은 사회주의를 혐오하는 것도 당연시한다. (271p)
당대 사회주의가 일반 대중에게 거부감을 준 이유 중 하나는 지나치게 기계적 진보와 결부되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경제성이 없으면 기술이 훼손될 것이라는 자본주의와 달리, 사회주의는 과학적, 기술적 진보를 보장하여 엄청난 과학적 진보를 달성할 것이라는 환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동시에 기계에 의해 인간이 잠식당하고,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디스토피아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인간성을 추구하고, 기계의 지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 도리어 사회주의를 배격하고, 그와 반대되는 파시즘을 추구하는 등 부정적 결과가 이어졌다.
■ 그들은 경제적인 면에만 눈이 멀어 있어서, 인간에겐 영혼이란 게 없다는 가정에 따라 활동해 왔으며, 노골적으로건 암시적으로건 물질적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말았다. 때문에 파시즘은 쾌락주의와 진보라는 값싼 관념에 반발하는 모든 충동을 이용할 수 있었다. (288p)
한편,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혁명이라는 과격한 해결책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동시에, 인간을 경제적인 요소로만 작동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보았다. 이는 앞선 기계 발전 논의와 엮이며, 사회주의는 곧 물질적 유토피아만을 추구하는 사상 체계로 비치게 되었다. 덕분에 사회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파시즘은 그것과 반대되는 정통의 수호와 가톨릭 정신이라는 핵심 이미지를 가져갈 수 있었다. 오웰의 말에 따르면, 파시즘은 무엇이든 사회주의와 반대되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이미지가 훼손되고, 오도될수록, 유럽에서의 파시즘 광풍은 더욱 강력해졌다.
■ 그러므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할 일은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다. (295p)
결국 오웰이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결론은 사회주의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유도에는 이전의 사회주의가 가진 부정적 이미지와 거부감이 아닌 친근함과 인간성, 정의로움을 강조하는 방향이 오웰 사상의 핵심이다. 그 후의 유럽이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전쟁터로 바뀌어 혼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 보면, 오웰의 사상이 새로운 사회적 방향성이 되지 못했던 것에 다소 아쉬움이 남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