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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전북스 Apr 07. 2023

『나는 왜 쓰는가』
"오웰의 철학이 담긴 에세이집" 2

<조지 오웰> 5편

[ 개별 에세이 작품소개 : 11~20번 에세이 ]

  

한겨레출판에서 집필한 이 책 <조지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이 영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시작한 1931년부터 작가 생활의 말년이었던 1948년까지 집필한 여러 편의 에세이 중 그의 철학이 드러나는 대표작 29개를 엮은 에세이집입니다. 연도순으로 나열된 여러 에세이를 읽어가면서, 독자들은 조지 오웰의 삶과 철학, 문학관과 작가관, 그가 시대에 가졌던 문제의식 등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조지 오웰의 작가 소개 글에서도 이미 설명했듯이, 조지 오웰의 글과 철학은 ‘압제적인 정치권력과 억압받는 피지배자’, ‘격정적인 시대 속에서의 작가와 문학의 역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지신의 글에 분명한 정치적 의식을 담고자 했으며, 사회에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번 에세이 작품에서 살펴볼 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지배층이 권력 유지를 위해 선택하는 전략 (2) 사회 하층민, 피지배 계층의 우울한 생활상에 대한 이해 

(3) 스페인 내전의 참전 경험과 노동자 혁명의 한계 (4)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주의의 역할

(5) 억압받는 시대 속에서 문학과 작가의 역할과 책임  

    

이번 연재글에서는 책에 담긴 29편의 에세이를 전부 다루고자 합니다. 각 작품의 핵심 문장과 메시지를 전달하며, 독자분들이 조지 오웰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드리고자 합니다. 각 10편의 에세이씩 총 3편의 글을 연재할 생각이며, 독후감 1편에서 다룰 작품은 1943년 작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부터 1946년 작 ‘정치와 영어’까지입니다. 

 



■ 11.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1943) : 정보를 믿는 것은 정치적 편향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데 당시에도 그렇고, 그 이후로도 줄곧 인상적이었던 것은 잔학행위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순전히 정치적인 편향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적의 잔학행위는 믿으면서 자기편의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오웰의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은 그에게 정치권력과 이념이 작동하는 방식의 민낯을 보여준 충격의 과정이었습니다. 특히 이 에세이에서 지적하는 부분은 객관적 진실의 존재를 부정한 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신문과 언론을 조작하는 권력층의 횡포와 훼손되어 버린 언론의 상황, 이로 인해 왜곡된 믿음으로 그들을 지지하는 지지자들입니다. 스페인 내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각 권력층은 필요에 따라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신념을 극단적으로 바꾸었는데, 이전까지 전쟁에 반대했던 이들이 갑자기 전쟁을 무궁한 영광이며 사명으로 여기는 등의 태도가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이때, 이들의 무분별한 책임 회피가 가능했던 이유는 신문과 라디오가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오직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어떠한 진실도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현재 권력자의 입에 나오는 말만이 옳은 것이라고 국민들을 속였습니다.


오웰의 대표작인 <1984>에서 빅 브라더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는 핵심은 과거의 모든 기록을 조작하여 빅 브라더의 말이 언제나 옳고 진리인 것처럼 꾸며내는 속임수였습니다. 오웰은 일찍이부터 언론이 절대 정확하고 객관적인 진실을 설명해 줄 수 없음에 주목하였는데, 그가 스페인에서 목격한 현실은 언론에 대한 더욱 심각한 왜곡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를 포기하였고, 오직 당의 노선이 ‘일어나길 바라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내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세상은 실제 삶으로 마주하는 세상이 아니라, 신문 위의 활자에 존재합니다. 또한, 사람들을 당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충성을 바탕으로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멈추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상대편의 것이라면 악이며, 자신의 편이라면 선이자 정의라는 믿음 하나만을 따르며, 자신들의 지지를 정당화할 뿐입니다. 이처럼 스페인에서의 비정상적인 경험은 언론이 정치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며, 파괴적인 일인지를 전달해 주는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글의 말미에 파시즘과 절대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중추로서 노동자 계급에 주목합니다. 오웰이 바라보는 노동자 계급이 추구하는 가치는 어떤 사회적 이익이 아닌 인간다운 삶 그 자체이며, 사회를 인간답게 재건하는 데에 저항의 목적이 있습니다. 오웰은 노동자 계급만이 계급사회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항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하고 더 인간적인 세계를 건설하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희망이 있음을 강조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 12. 나 좋을 대로(1944~45) : 오웰이 '좋을 대로게재한 정기 에세이

“아무튼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덩굴장미는 헤매다 한 달 내지 6주 동안 꽃이 활짝 피어있을 것이고, 덤불장미는 적어도 넉 달에 걸쳐 꽃이 피고 지기를 거듭할 것이다.”


오웰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잡지사 <트리뷴>지에서 문예부분 편집장으로 일하며, ‘나 좋을 대로’라는 제목의 주간 칼럼을 꾸준히 게재하였습니다. 칼럼의 이름처럼, 그는 때마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진솔하게 풀어내었습니다. 본 책에 수록된 이 작품은 그가 게재한 칼럼 중에서 가장 짧은 글로, 6페니를 주고 꽃을 구입하여 만족을 얻었던 소소한 경험을 흥겹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6페니로 저렴하게 구입한 꽃이 자라 아름다운 장미 넝쿨이 된 모습을 본 오웰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에서 행복과 감사함을 느끼는 듯 보입니다. 오웰의 몇몇 작품에서는 자연을 예찬하는 그의 태도가 드러나는데, 이 작품 역시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따스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 13. 시와 마이크(1945) : 모든 예술은 정부와 독점기업에 의해 통제받고 훼손되고 있다.

“예컨대 정부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필요하면 영화제작 전문가들을 써야 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그래서 관료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잘못된 영화가 나올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오웰이 영국의 BBC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하며 시를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던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글의 전반부에서는 시가 대중과 멀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며, 시만큼 지루하고, 어려우며, 현실과 상관없는 지적 허세만 가득한 글로 여겨지는 대중문화가 없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의 감정을 고취시키는 다양한 형태의 시가나 애국시를 즐기고 있다는 점은 사람들이 운문의 형태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웰은 이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는 시 역시 스스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당시 존재했던 시와 대중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에게 다가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한편, 책의 후반부에서는 오웰이 시를 대중화하기 위해 선택했던 수단인 라디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전달합니다. 비록 그가 라디오라는 언론 매체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지만, 그는 전파를 타는 모든 방송들은 이미 정부와 거대 독점기업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예술 작품이 전파를 타는 일이 사라질 것임을 경고합니다. 핵심은 본인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독점적 정부는 지식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예술의 자유로움을 훼손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작가, 화가, 배우 등 예술가를 정부의 손아귀 안에 끌어들여 선전홍보 업무에만 예술가의 자리를 내어줍니다. 


헌데, 오웰은 예술가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역설합니다. 아무리 정부가 그들의 표현을 억압하고 검열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선전 업무를 위해선 예술 영역의 전문가들을 써야 합니다. 정부라는 거대 기계가 더욱 거대화될수록 모든 영역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예술가는 각자 나름대로 허용된 자유로움과 창조 속에서 정부에 반하는 내용을 교묘하게 퍼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돌아보면, 오웰이 라디오를 통해 시를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행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적인 경고의 메시지를 무엇보다 함축적이고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많은 방송이 애국주의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예술이 끼어들 빈틈은 존재합니다. 따라서 오웰의 라디오 방송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시가 가진 힘과 중요성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회적 계몽 운동의 한 방향으로 보아야 합니다.  


■ 14. 민족주의 비망록(1945) : 민족주의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 판단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모든 민족주의자의 변치 않는 목적은 더 많은 세력과 위신을 확보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억누르고서 섬기기로 한 나라 또는 다른 어떤 집단을 위한 일이다.”


이 에세이는 오웰이 여러 차례 경고하였던 무책임하고 맹목적으로 정권을 지지하는 무지성적 대중을 분석한 글입니다. 여기서 오웰이 언급하는 ‘민족주의’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특정 민족(nation)에 대한 사랑과 충심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글에서 지목하는 민족주의자들은 1) 인류를 특정 기준에 따라 분류할 수 있고, 그들을 싸잡아서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습성, 2) 자신을 나라 또는 집단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선악을 초월하는 것으로 여기며 오직 집단의 이익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습성을 지니고 있는 자입니다. 조국을 위한 긍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애국주의’와 다르게, ‘민족주의’는 오직 자신의 편이 정의이며 선이고, 누구보다 가장 강해야 한다고 믿는 힘과 경쟁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들의 믿음과 같을 수 없는데, 이때 민족주의자들은 의도적으로 ‘현실을 왜곡하여’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강한 신념과 믿음을 지키고자 합니다. 오웰은 그들의 특징을 3가지로 정리하는데, 1)강박증: 가능한 한 자신의 세력 집단의 우월성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쓰지 않는다. 2)불안정: 상황에 따라 숭배의 대상을 전이할 수 있고, 과거의 숭배가 오늘날의 혐오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3)사실을 무시하는 태도: 주체에 따라 행위의 선악 여부를 판단하고, 자신의 편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 가 그것입니다. 


민족주의가 가진 가장 큰 무서움은 과거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입니다. 강렬한 비이성적 믿음 앞에선 진실을 전달하는 행위가 무의미한데, 그들은 구체적 사실을 억압하거나 마음대로 날짜와 사건을 바꾸어버리면서 왜곡된 사실을 ‘진실되게’  믿어버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두려움, 증오, 질투, 세력에 대한 숭배를 주입하는 순간 그들은 현실감각을 잃어버리고, 금세 민족주의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극한의 상황 속 전쟁의 두려움과 적에 대한 증오와 질투, 자신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한다면, 대부분의 국민은 이성과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국가와 정권을 위한 충실한 숭배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웰은 지식인들이 자신이 가진 감정과 실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며, 정치적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이를 잃어선 안 됨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 15. 당신과 원자탄(1945) : 무기 기술의 복잡성은 권력의 집중과 결부된다

“가장 강력한 무기가 비싸고 만들기 어려운 시대는 폭정의 시대인 경향이 있고, 가장 강력한 무기가 싸고, 단순한 시대에는 서민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무기는 강자를 더 강하게 만들고, 단순한 무기는 약자에게 갈고리발톱이 된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두 달여 뒤에 발표된 이 글은 원자탄을 비롯한 가장 강력한 무기의 제조 기술에 따라 국가 간 권력 관계와 인류의 역사가 바뀔 것이라는 오웰의 예언적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원자폭탄과 같이 제조가 어려운 특정 기술이 세계를 지배하는 경우 특정 거대 국가만이 그 기술을 소유하고, 다른 국가와 민족을 위협하는 거대 제국이 되어 피지배 민족과 계급은 더욱 암울한 미래를 맞게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에 반해, 가장 강한 무기의 난이도가 낮아질수록 피지배 민족과 피억압 계급들은 이전의 계급 사회를 무너뜨릴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에세이에서 오웰이 예언하는 무기의 난이도로 인한 거대 제국의 탄생은 그의 대표작 <1984>의 상황의 배경이 된 듯 뵙니다. 복잡한 무기 기술을 가진 몇 개의 거대 제국들은 무기를 이용해 약소 국가를 위협하며 그들의 지배 관계를 더욱 공고히 만들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지닌 군사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위협적인 것인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정부 독점의 필요성을 더욱 정당화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국가를 위기 상황에 놓인 것처럼 국민들을 속이려 할 것입니다. 오웰은 이어진 세계 대전으로 군사적 갈등이 가장 고조되었던 1945년에 이 글을 쓰면서, 세계가 점점 더 3개의 거대 제국으로 나뉘어가고 있음을 걱정하고, 지속적인 과학의 발달이 무기 기술을 가속화하여 계급이 더욱 공고해질 것임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군사력의 차이로 인한 차이는 아닐지라도, 오늘날 세계 역시 특정 거대 국가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오웰의 경고를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 16. 과학이란 무엇인가?(1945) : 과학은 논리적인 추론과 올바른 사고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확실히 과학교육은 합리적이고 회의적이며 실험적인 사고의 습성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방식, 즉 부딪히는 어떤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을 습득하는 것이어야지, 사실을 잔뜩 축적하는 것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의심이나 비판을 하지 않고 정부의 수하로 전락해 버린 당대의 주류 과학계를 비판하기 위해 쓰인 이 글은 과학이 무엇이며, 과학자들은 사회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오웰의 비판적 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과학이란 크게 2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하나는 화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기술이나 이론 등 과학 영역 그 자체, 또 다른 하나는 사실을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따지며 참된 결론을 추론하는 올바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의미합니다. 비롯 과학자라면 주어진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해석하여,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군사적 갈등이 심화되고 과학이 무기 개발을 비롯한 정권 유지를 위해서 쓰였던 시대에서 과학자들은 이러한 과학적 태도를 아예 포기한 듯 보입니다.     


우리는 과학이 모든 인류를 위한 기술이 되어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당시의 과학자들은 작가나 예술가에 비해서도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낀 채로 자국 정부의 편에 서서 활동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나치의 과학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나치의 반인륜적 행위를 묵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생학적 근거와 거짓된 논리를 전개하며 그들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과학적 태도에 정확히 위배되는 것으로, 그들은 진실된 진리를 찾아서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틀을 빌려 그럴듯한 거짓을 만드는 데 집중했을 뿐입니다. 오웰은 단순히 특정 영역의 지식을 뜻하는 과학이 아닌,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의 추론 방식을 다시금 조명하며, 당대 과학자의 반성적 자세를 촉구하였습니다. 또한, 대중을 상대로 한 과학 강의 역시 특정한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고방식을 얻는 과정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 17. 문학 예방(1946) : 완전히 비정치적인 글은 존재할 수 없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문학은 아마도 이런 식으로 생산될 것이다. 문학이란 게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말이다. 글쓰기 과정에서 상상력은 (어쩌면 의식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책은 관료들에 의헤 다종다양하게  계획될 것이며, 포드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개인의 작품이랄 수 없을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발간된 팜플렛 [아레오파지티카]의 발간 300주년을 기념하는 펜클럽 대회에 참석한 오웰은 행사에 참여한 대부분의 연사들이 언론의 검열에 찬성하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오웰은 이미 당대 ‘지적인 자유’라는 개념이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가 결코 놀랍지 않았다고 서술합니다. 문학과 언론을 공격하는 대표적인 적으로는 전체주의 옹호자들과 독점적이고 관료적인 지배 체제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상과 언론의 자유라는 가치를 무시하고, 모든 언론인과 예술가를 오직 정해진 주제만을 다루게 하는 하급 관리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이들은 모든 상황을 국가와 개인주의의 싸움으로 몰아가며,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는 곧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협적인 행동으로 비추고자 합니다. 이것은 전체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이며, 진실된 언론이라는 개념 자체를 왜곡하는 힘으로 작동합니다.      


결국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역사는 있었던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무언가입니다. 오웰은 이들이 사실상의 ‘신정 국가’와 같다고 표현하며,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고자 스스로를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로 꾸며낸다고 지적합니다. 절대 권력자들은 과거를 계속해서 개조하는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객관적 진실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되는 상태를 만들고자 합니다. 즉, 이들을 지지하는 민족주의자들은 권력자들의 말 외에는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결코 도달할 수 없으니, 차라리 정부의 말을 온전히 믿어버리는 게 낫다는 식으로 행동합니다. 이는 사회 전체적인 흐름이며, 심지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지식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무엇보다 어려운 과정입니다. 창의적인 작가가 정부를 위해 정해진 글을 조립하는 경우, 그는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아예 억누르고 사고의 폭을 극단적으로 좁혀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문학이라고 부르던 장르에서 상상력과 창조성이 아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문학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학과 정치적 글쓰기를 온전히 분리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사고방식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예술성을 가지면서도 정부에 충실한 글을 써 내려갈 수 없습니다. 오웰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결국 작가와 문학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강한 경고와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 18. 행락지(1946) : 자연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인간의 생활모습

“음악의 기능은 생각과 대화를 막는 것이며, 만약 음악이 없다면 끼어들게 될 새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라디오를 이용하고 있다.”     


행락지는 재미있게 놀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에세이에서는 현대 문명 사회에서 행락(쾌락)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여기선 당시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상의 행락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핵심은 자연을 멀리하고 인공적인 환경에서 인공적인 쾌락을 느낀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댄스홀, 극장, 호화 유람선 같은 것에 열광하고, 음악과 라디오에 빠져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사람들 간의 대화와 생각 공유와 멀어지고 있습니다. 오웰은 사람들이 ‘행락’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대부분의 행위들은 결국 인간의 의식을 파괴하는 노력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필요한 존재인지. 가장 인간다운 표현 방법과 삶을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방법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에겐 온기, 사회, 여유, 안전이 필요하며, 고독이나 창조성, 경이감과 같은 가치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삶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충분히 남겨놓았을 때만 가능함을 강조합니다. 오웰이 그동안 표현했던 자연관을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자연 예찬의 태도는 결코 어색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정치적 갈등과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살아왔던 그였기에 인간다움의 가치는 무엇보다 지켜야 할 가치였을 것입니다. 산업화와 기계 문명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고민했던 오웰의 고민이 잘 표현된 작품입니다. 


■ 19. 물속의 달(1946) : 오웰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펍

“여름날 저녁이면 여기서 가족 파티가 열린다. 그럴 땐 누구라도 플라타너스 밑에 앉아, 미끄럼 타고 내려오는
아이들이 신나서 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맥주나 생사과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아기들이 타고 온 유모차는 문 가까이에 세워두면 된다.”     

 

이 짧고 귀여운 에세이는 오웰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펍의 조건 몇 가지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물속의 달’이라는 이상적인 펍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자신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물속의 달 펍을 소개해달라는 귀여운 부탁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소소한 행복과 흐뭇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 글 속에 묻어나는 오웰의 가족적인 모습 덕분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작품이 쓰일 당시 오웰은 아내를 잃는 비극 속에서도 입양한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돌보는 가족애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예쁜 펍에서 가족 파티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상상하며, 아버지로서 오웰이 느꼈을 행복을 생각하며 훈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20. 정치와 영어(1946) : 사고의 타락을 막기 위해선 언어의 타락을 해결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정치적인 말과 글은 주로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데 쓰인다. 때문에 정치적인 언어는 주로 완곡어법과 논점 회피. 그리고 순전히 아리송한 표현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무방비한 마을이 폭격을 당하고, 주민들이 시골로 내몰리고, 가축들이 기관총 난사를 당하고, 오두막들이 소이탄에 타버리는 것을 ‘평정’이라 부른다.     


작가로서 조지 오웰이 가진 장점 중 하나는 간결하고 정확한 문체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모호하고 진부한 표현을 사용했던 당시의 글을 비판하며, 언어 표현의 모호성이 정치에 줄 수 있는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표현의 모호함은 특히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심해졌는데, ‘파시즘’, ‘민주주의’, ‘자유’와 같이 가치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단어의 해석이 사람들마다 달라지게 되는 문제를 야기하며 올바른 논의와 비판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단정하지 못한 언어는 생각을 혼잡하게 만들고, 논점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속임수처럼 사용된 것입니다. 무방비한 마을을 폭격하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행위를 ‘평정’이라고 표현하면, 실제 사건이 보여주었던 잔인성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위를 한 것처럼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오웰은 이와 같이 언어의 의도적인 왜곡과 모호성은 우리의 생각과 관점을 왜곡하는 핵심임을 지적하고, 언어가 사건의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문제 지적에 따라, 정확하고 간결한 문체를 통해 모호성을 배격하고, 가장 우매한 통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역설합니다. 따라서 작가는 단순히 있어 보인다거나 새로운 표현을 생각하지 어렵다는 이유로 편리한 방식의 언어 사용을 해서는 안됩니다. 애매한 단어 사용을 피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을 정확히 표현할 때 비로소 정확힌 문제 인식과 해결이 가능함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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