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대회의 위대한 정신을 되새길 의도가 내게는 애당초 없었다. 마라톤 대회는 나의 달리기를 멈추게 하지 않는 장치일 뿐이었다. 3월에 열리는 동아마라톤 (서울마라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해놓아야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에서도, 한 겨울의 추위와 폭설 속에서도 달리기를 계속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만이 있었다.
나는 나의 달리기에 만족하고 황송해하고 있었다. 쉰아홉에 달리기를 시작해서 일주일에 3~4번 5km를 달리고, 일 년에 3~ 4번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서 10km를 달려내면 그것으로 족했다. 다른 욕심을 더하지 않는 것이 오랫동안 달리며 건강한 삶을 누리는 지혜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동아마라톤에서 달리는 내내 머릿속에는 그간의 나의 달리기에 대한 의문과 반성이 팝업처럼 터지고 있었다. 왜 10km만 달려야 한다고 믿었지? 풀코스 도전은 내 생애에는 진정 불가능한 거야? 기록을 단축시키려는 노력이 왜 의미 없다고 생각한 거지? 내 나이 대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더 잘 달릴 수도 있지 않을까? 위험한 욕망이 싹트고 있었다.
3월 중순 서울의 아침은 레깅스와 반팔 티셔츠, 그리고 얇은 바람막이로만 몸을 가리기에는 아직 춥다. 10km의 출발지는 올림픽 공원이고 도착지는 잠실 종합운동장이다. 기록이 없거나 기록을 인정받지 못하는 H조에 배정되었다. ‘H조에서 만나자~’라고 친구와 부실한 약속을 한 탓에 검은 옷 일색인 사람들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그녀와 나는 그날 끝까지 만나지 못했다. 친구가 없다고 외롭지는 않다. 함께 모여있는 러너들은 낯설지만 동지들이다. 내 또래의 중년 여인은 주머니에서 만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뛰기 싫어지면 중간에 택시 타고 갈 거라며 그 용도를 알려준다. 20대의 싱그러운 청년들은 자신이 속한 러닝클럽을 소개하며 너무나도 황송하게 나를 초대하겠다고 말해준다.
출발 전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러너들은 무조건 샤우팅이 하고 싶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드론을 향해서도 송파구청장의 의례적인 인사말에도 환호한다. 행사 아나운서가 이영표, 조원희, 박보검 씨 등이 출전했다는 멘트를 하자 일제히 열광하지만 H조에서는 그들의 그림자도 볼 수가 없다. 박보검, 이영표 씨의 기록은 45분대라니 다음에는 기어코 A조에 들어가리라 라는 느닷없는 승부욕이 그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메이저 마라톤 대회의 위상은 역시 다르다. 올림픽공원 앞의 모든 차선에서 차를 멈추게 하고 사람이 달리게 한다. 오랜 세월 동안 거주해 온 잠실일대는 작은 골목길까지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점령자처럼 대로변을 달리면서 느끼는 잠실은 다르다. 경사가 거의 없는 반듯한 길로 이어지는 대로를 따라서 빌딩과 공원과 아파트들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우면서 당당한 도시의 자태를 차례대로 드러낸다.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함성을 지르며 꼴찌 조의 러너들이 일제히 튕겨나간다. 자신의 페이스와 몸짓으로 달리기 할 수 있는 공간을 차지하려는 다툼이 치열하다. 휘청거리고 부딪치기를 몇 번 한 끝에 나의 달리기 자리를 겨우 확보한다. ‘처음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하기’가 초보마라토너인 나의 유일한 작전이다. 겨우내 트레드밀에서만 뛰었기에 길 위에서의 속도감이 가늠이 안 된다. 주최 측에서 제공한 등번호 판에 부착된 칩 이외에는 심장박동수나 분당 페이스를 체크해 줄 어떤 장치도 없다. 1년 동안 달려온 나의 다리와 심장을 믿을 수밖에. ‘후후’ 내뱉고 ‘흠흠’ 들이마시며 일정하게 호흡을 유지하고 다리가 알아서 속도를 조절해서 달리도록 내버려 둔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짧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초보 러너의 호흡이 들리고 규칙적인 호흡을 하는 경험자의 숨도 느껴진다. 기쁘게도 나는 후자의 호흡을 한다. 달리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깡충 뛰어올랐다가 나비처럼 가볍게 착지하며 뛰는 사람. 팔을 열정적으로 휘두르며 뛰는 사람, 아침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입었던 우비를 끝까지 입고 뛰는 사람, 왕관을 쓴 사람, 햇빛에 반짝이는 황금빛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여신처럼 뛰는 사람, 쉬지 않고 샤우팅을 하는 사람, 휠체어를 힘차게 밀며 달리는 사람...
그들 속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는 느낌도 잠시이고 나는 곧 나만의 세계에 침잠한다. 내 몸과 내 마음이 온통 문이어서 사람들이 거칠게 드나들며 나를 헤집고 다니고 수상쩍은 소문들이 수시로 들어와서 나를 어지럽히는 게 일상사였다. 몸과 호흡에만 집중하며 뛰다 보면 외부로 활짝 열려있던 그 문들이 서서히 닫힌다. 내 몸의 관절들이 움직이는 모양과 땅에 착지할 때의 내 발의 상태와 호흡을 체크하며 몸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나누는 것은 명상의 과정과 같다. 나의 숨소리만 들리는 침묵 속에서 비로소 온갖 상념으로부터 놓여나게 된다.
시작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앞질러 달려 나가고 나는 그들을 따라붙지 않고 놓아준다. 3km가 지나면서 걷는 사람들이 생기고 5km가 넘어가니 나를 추월해 가는 사람들이 적어진다. 7킬로미터 이후에는 내가 많은 사람들을 앞지르기 시작하는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같은 호흡과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하며 10km의 피니쉬 라인을 통과한다. 공식 기록은 58분 08초. 후반 5km의 분당페이스 기록이 전반보다 좋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초반에 나의 페이스를 찾지 못했던 것과 지치지 않았음에도 7~8km 지점쯤에서 속도를 더 높이지 못한 것, 그리고 피니쉬 라인을 앞두고 마지막 스퍼트를 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겨울을 무사히 나고, 더 좋아진 기록을 갖고 달리기의 2년 차를 맞이할 수 있게 된 것과 10km 달리기가 더 이상 어렵지 않게 느껴진 것, 무엇보다도 달리기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 것은 동아마라톤에서 얻은 수확이다.
그런데 큰일이 생겼다. 어처구니없게도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풀코스를 완주해보고 싶다는 가당찮은 욕망이 생겼다. 10km의 50분 후반대의 기록을 10분 정도는 단축시키겠다는 목표도 세우고 싶어졌다. 런던이나 파리 마라톤에 참가하고 싶다는, 그게 불가능하다면 구경꾼이라도 되어보고 싶다는 소망이 올라온다. 이 나이에 ‘불굴의 도전 정신을 키워 나 스스로와 경쟁한다’라는 마라톤 정신을 깨닫고 실천할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욕망대로 나를 내모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그 욕망을 철저히 외면해 버리면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 잘 타협해야겠다. 하루하루 나를 성장시키는 달리기가 오래 계속될 수 있도록 영리하게 계산하고 나의 욕망도 잘 달래고만족시켜야한다는 숙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