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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Aug 12. 2023

슬픔의 늪

애도일기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나고 조카들이 다시 내 집에 둥지를 틀었다. 살림 힘들어 했던 동생을 대신해서 아이들을 키워준 세월이 오래라 낯선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미가 살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전혀 다른 국면이었다.  미보다 와 보낸 시간이 더 길다고 내심 생색을 내었건만, 아이들과 함께 하며 쌓았던 시간의 축적이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륜은 무겁고도 깊었다.


 집에 돌아온 우리는 오랜 습관대로 움직였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때가 되면 끼니를 해결하고 밤이 면 잠을 잤다. 지만 평범한 듯 다시 시작된 일상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허리가 꺾여 일어서지 못했다. 우리는 모든 순간 미세하게 떨리는 심장을 그러안고 각자의 생이 상실한 지평선을 찾아 소리없이 울었다. 아이들은 여일해야 할 생의 동력을 잃어 절망했으며  역시 오늘의 안정과 내일의 낙관이 사라진 황무지를 헤매 했다. 내 나이만큼 오랜 악몽들이 결박을 푼 채 흙바람 위로 떠오를 때면 나의 육신 순간 질량을 잃고 떠올랐다. 삶의 중력을 벗어난 몸이 밥을 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했다. 뱃속 어딘가에 들어앉은 검은 우주가 끝없이 나의 숨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살 가족의 치유를 돕는 프로그램, '자작나무'의 도움으로 우리 모두 몇 차례 상담을 받았다. 동생을, 엄마를 그렇게 보낸 죄책감과 슬픔 한 귀퉁이나마 흘려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감정을 알아차리고 말로 표현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그 때 절실하게 깨달았다. 어쩌면 그 덕에 길고도 험난했던 이별의 강을 살아서 건넜는지도 모른다.


고통을 호소하며 이야기를 하자고 자주 말하던 작은아이와 달리 내내 입을 닫고 있던 큰아이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밤이 되면 환청 때문에 잠을  자고 몸을 동그랗게 오모서리를 찾아 숨었다. 이제 열여덟 살 된, 어둠 속에서 아지다 점이 되어 사라질 것 같은 조카딸의 등을 쓰다듬고 있노라면 나도 이 슬픔을 이기고 살아질 것 같지 않았다.

서둘러 정신분석가를 소개 받아 좀더 깊은 상담을 시작했다. 조금 나아지는 듯하다가도 부침을 반복하며 큰아이의 시간이 꾸역꾸역 흘러갔다. 그럼에도  나는 역부족인 나를 대신해줄 지원군을 얻은 것에 마음이 놓였다. 가 받지 못했고 주지 못했던, 려깊은 부모의 돌봄과 수용을 경험할 수 있게 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장례 두 달 후, 작은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지금도 가끔 그 날의 동영상을 재생해 보곤한다. 영상 속의 녀석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행사의 진행에 따라 영혼 없이 움직이다가 가끔 억지 웃음을 웃다. 이모가 마음을 다해 보살펴도 푸석푸석 꺼칠하고 빛이 사라진 아이는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두려워 어찌할 줄 몰랐다. 졸업식 며칠 전에 아이에게 편지를 받았다. '이모, 수업시간에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냥 이모한테 쓸게. 이모 오래오래 살아. 사랑해.' 펼쳐진 종이 앞에서 아이가 느꼈을 슬픔과 살아남기 위해 다란 끈이라도 붙잡으려는 절박함이 함께 읽혀 마음이 아팠다. 

중학교 배정 받았다. 옆 동네에 있는 학교로 친한 친구 없이 혼자 가게 됐다. 전혀 새로운 시작 앞에서 오르는 불안을 아이는 이기지 못했다. 겁 많고 다정하던 아이가 뾰족해지면서 말수가 점점 줄었다. 학원에 결석하는 날많아지고 내가 하는 말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 월이 지난 지금이야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처연했을지 알고도 남지만 그 때는 잘 몰랐다.


오랜 습관의 마지막 호의였던 짧은 안정 이른 봄의 눈처럼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우리 모두의 혼돈의 창에는 검은 해가 뜨고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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