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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May 29. 2023

효도

제 5계명 - 집을 짓는 하뜸





드넓은 바다와 푸른 풀밭이 낯설다. 온세상이 황토색인 곳에 있다 보니 색깔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 남편에게 계속 이야기한다. 바다가 정말 파란 것 같아! 하늘이 진짜 하늘색이야! 저기 봐봐. 초록색 풀밭이 있어! 같은 아시아라도 한국, 중국, 일본이 다르듯이 중동이라도 예멘, 튀니지, 이집트가 다르다. 튀니지는 중동과 유럽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느낌이었다.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도시, Beja(베자)로 가는 작은 봉고차를 타는 내내 나는 어린아이처럼 우와를 연발했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나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저기 저 멀리 베자가 보인다. 이번엔 남편이 신이 났다. 저 건물이 아직 있다고, 여기는 하나도 못알아보겠다며 말했다. 이제 정류장인가보다. 봉고차가 멈추고 하나둘씩 차에서 내렸다. 뒤에서 남편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Hey! Shams!” (샴스! 여기야!)


남편의 얼굴에 반가움이 묻어난다. 한쪽 손으로 악수를 하고 다른 팔로 허그를 한다. 하뜸이다. 내가 옆에 있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한다. 차를 타고 이동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가 오가는 내내 하뜸은 내게 말을 건다. 튀니지 친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하는 친구. 남편이 다른 친구들과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때, 하뜸은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내가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

 

 “Lucy, have you heard of Slata Mouchuia?” (루씨, 슬라타 무슈위야가 뭔지 알아?)

  “Yes! Shams told me. I heard it is very tasty.” (응, 샴스한테 들었어. 엄청 맛있다던데.)

  “Right. Do you know who the best cook for that dish is?” (맞아. 그거 누가 제일 잘 만드는지 알아?)

  “I don't know. Who is?” (글쎄. 누구야?)



우리는 모퉁이를 돌았다. 골목길을 지나니 빌라들이 모여 있다. 한참을 걸었다. 오랜 시간 여행으로 나는 점점 지쳤다. 남편이 하뜸에게 잠깐이라도 쉬자고 말해주면 좋겠는데. 앞서가는 남편의 어깨가 들썩인다. 하뜸과 대화하며 제스처가 점점 커진다. 아. 들떠 있구나. 마침내 하뜸이 걸음을 멈춘다. 여기인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며 하뜸은 누군가를 불렀다. 좁은 마당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간다. 타타타. 남편은 가볍게 오르다가 잠시 멈추고 한숨을 쉰다. 온가족이 나와 우리를 환영한다. 남편은 뛰어가서 할머니의 두 손을 잡았다. 여든이 훌쩍 넘은 할머니는 아무말 없이 미소를 짓는다. 구부정한 허리로 잡고 있는 남편의 손을 쓰다듬는다. 남편 손 위에 올려진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아름답다. 하뜸은 할머니에게 '슬라타 무슈위야'를 해달라고 한다. 할머니는 이미 알고 있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편히 앉아 있으라고 하신다.



하뜸은 가족이 많다. 할머니와 부모님과 형과 동생들도 있다. 형은 유럽에서 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 언제나 기회만 닿으면 튀니지를 뜰 거라고 노래를 부른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동생들은 중학교에 다닌다. 하뜸은 직업이 여러 개다. 낮에는 대학교 행정실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시장에서 물건을 떼다 판다. 주말에는 아랍어 과외나 영어 과외를 해준다. 이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은 전부 지금 이 집을 사는데 들어갔다고 했다. 남편이 튀니지에 살 때만 해도, 하뜸 집은 방 두어 칸에 모든 형제자매들과 부모님, 할머니까지 함께 지냈다. 남편은 하뜸을 자기 집에 와서 지내라고 했고, 그래서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 방을 가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만 3년, 하뜸은 집을 짓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하뜸의 표정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기를 속이는 법이 없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집을 짓고 있지만 그 또한 자기를 위함인 것도 안다. 에둘러 효도한다고 말하지 않는 그 모습에서 오히려 얼마나 더 가족을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



지붕 없는 집. 중동에는 지붕이 없는 집들이 많다. 사실 지붕이 없다기보다는 옥상이 없다. 대부분 빌라가 몇 층까지 짓고나서 천정을 옥상으로 마무리하는데, 아직 꼭대기층이 완성이 안된 집들이 많은 것이다.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공사를 진행하다보니 생기는 일이다. 그래서 지어진지 10년이 다되어가는 건물도 옥상이 없는 경우가 있다. 하뜸의 집에도 지붕이 없다. 성실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이 살아도 아직 마무리까지 하기는 어려운거다. 어깨에 지는 책임감이 무거워 유럽으로 떠나려는 형과 때때로 싸우기도 한다. 아직 어린 동생들 학비도 내야 한다. 부모님은 점점 나이가 들고, 등이 굽은 할머니가 느릿느릿 살림을 한다. 하뜸은 이것을 감당한다. 힘들 때도 있고, 분명 도망가고 싶기도 할텐데 매일을 그 자리를 지켜낸다. 성실하다는 것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말하고 싶은 것을 성의를 가지고 대하는 것이다. 하뜸은 자리를 지킴으로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 성의를 가지고 삶을 대한다.



벌써 두 시간. 할머니가 우리를 먹이겠다고 음식을 하러 가신 후 좀처럼 소식이 없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우리가 괜히 와서 연세 드신 할머니 밥을 시킨다 싶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하뜸은 계속 괜찮다고 말한다. 루씨, 괜찮아. 할머니가 샴스를 너무 사랑해서 손수 밥해주고 싶으신거야. 이윽고 할머니가 하뜸을 부른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베란다에서 무언가 굽는 냄새가 난다. 고개를 돌리니 쪼그리고 앉아 느릿느릿 부채질을 하는 할머니가 보인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슬라타 무슈위야'는 숯에 고추, 피망 등을 오래도록 충분히 구워서 하나한 껍질을 벗기고 곱게 다져 올리브 오일과 섞는 일종의 소스 같은 거다. 그 빵에 찍어 먹는 소스를 만드려고 등이 굽은 할머니는 숯을 가져와 불을 피우고 쪼그려 앉아 불이 잘 붙도록 후후 입김을 불고 부채질하며 야채들을 구운 거였다. 그저 손주가 사랑하는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제 손으로 해먹이겠다는 마음 하나로 할머니는 약한 육체를 이겨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할머니는 기꺼이 홀로 되었다. 기꺼이 승화되고 심화된 홀로 됨을 택했다. 할머니가 평생 보여준 사랑은 하뜸의 마음에 스스로 원함을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Akedah(아케다)'를 가장 높은 차원의 효로 본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한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아들을 주겠다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이제 그 아들을 거두겠다 하시니.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은 알겠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냐고. 아버지는 하나님이 준비해주실 것이라는 대답을 하고 제단을 쌓는다. 이삭을 묶고 칼로 잡으려고 하는 찰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는 순종을 보시고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셨다. 그 때 이삭의 나이는 30대 중후반, 어린이가 아닌 장정이었다. 100세가 넘는 아버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번제할 어린양 없이 제사지내러 가는 아버지가 이해가 안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믿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죽음까지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케다'이다. 유대인들은 이 이삭의 모습을 효도의 진수라고 생각한다. 자녀가 스스로 원하는 마음이 생겨서 부모의 원함을 순종하는 것. 그것이 효도다. 



해외 거주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부럽다였다. 이는 아이 교육 때문도 아니고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어서도 아니다. 경조사를 안챙겨도 되어서 부럽단다. 친정식구, 시댁식구를 마땅히 챙기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있으니 좋겠다고 했다. 아. 사람들 마음에 가족에 대한 책임이 짐이 될 때가 많구나.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의무감. 기쁨이라기보다는 도리. 그래서 안챙겨도 욕안먹는 내 상황이 부러웠나보다.



마음에 원함이 생기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할 수 없다. 샘솟아 난다. 아이는 자기가 어떤 말을 할 때 내가 기쁜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좋아하는지 다 안다. 그래서 내가 기운이 없어 보일 때, 내 앞에 와서 재롱을 떤다. 귀여운 춤을 추고 엄마 보세요 한다. 나의 기쁨이 곧 그의 기쁨이 된다. 내 존재로 그의 존재를 확인한다. 30대 중반이 넘어가니 나도 내 주장이 강해진다. 나도 엄마라는 생각.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은 나의 태도로 드러난다. 엄마 아빠와 통화하며 아이에 대해 무언가 피드백을 할 때 내 태도에 오롯이 드러난다. 나도 나의 아이처럼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지금 나는 아이에게 충분히 아이의 자발적인 순종의 마음을 받고 있다. 나의 부모님은 내게 그 마음을 받고 있는가.



아이의 순종으로 하뜸의 효(孝)를 본다. 그 마음이 순전하고 귀하다. 나의 마음을 기다리는 부모님을 생각해본다. 오늘은 전화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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