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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May 27. 2023

시간의 부재는 소통의 부재로

하브루타 - 무슬림 소녀 라미스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 문 앞에 선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학생들이 고개를 돌린다. 수많은 눈들이 나를 쳐다본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나의 전신을 스캔하며 내 표정을 관찰한다. 발가벗겨진 기분이 이런 것일까. 전진도 못하고 후진도 못하고 우리 안의 원숭이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데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미스 여기 앉아요. 반색을 하며 나를 부른 여학생을 찾는다. 누가 불렀을까. 티가 나지 않게 눈으로만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모두가 똑같은 복장이다. 몸에는 까만 아바야를 입고, 머리 한 올 보이지 않는 까만 히잡을 쓰고, 얼굴을 가리는 까만 니깝과 손가락조차 보여주지 않는 까만 장갑까지. 나는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당황하는 나의 기색을 눈치챈 친절한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었다. 내가 발을 떼자 교실 안의 모든 눈이 내 걸음걸이를 관찰한다. 나는 조심조심 그녀 옆에 앉았다.







눈이 예쁜 라미스. 그녀는 대화를 좋아한다. 모국어 말고 다른 나라 언어로 이방인과 이야기하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드는데, 그녀는 자신의 삶의 사소한 부분까지 내게 표현한다. 인종과 종교와 문화를 넘어 우리는 생각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언어와 환경은 다르지만 호의와 애정을 바탕으로 견해가 일치하는 우정을 나눈다. 예멘에서 유일하게 나의 일상을 궁금해 하는 라미스. 그녀의 까만 옷 안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 



라마단 기간의 어느 밤, 나는 라미스 집에 초대를 받았다. 증조 할아버지부터 라미스까지, 그 집엔 이렇게 4대가 산다. 전통적인 예멘의 집이다. 라미스는 온 식구에게 나를 소개시킨다. 나는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거동이 불편한 증조 할아버지 방에도 들어가서 인사를 했다. 4층집을 오르락내리락 했더니 인사만 해도 몸이 지친다. 그 때 벨 소리가 울린다. 딩동. 라미스의 사촌 자매들이 놀러왔다. 라미스와 동생들, 사촌자매들까지 열 명이 라미스의 방에 모였다. 부모님은 동네 잔칫상처럼 음식을 차려오셨다. 갓 구운 예멘빵에 내가 좋아하는 후무스를 올려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후무스와 올리브 오일의 고소함이 입 안에 가득 찬다. 라미스의 엄마는 나의 먹는 모습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짓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라미스는 친구를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 늘 친구들이 많이 방문한다. 엄마는 항상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라미스의 친구들을 대접해준다. 라미스는 사랑받고 있는 딸이자 손녀다.


  “Lucy, We spend time with our family every Friday after the Mosque” (루씨, 우리는 매주 금요일 모스크에서 예배 드린 후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

  “Every Friday?” (매주 금요일?)

  “Sure! It is actually our Family day. We talk over a good meal for 2-3 hours.” (그럼! 그 날이 우리 가족의 날이야. 우리는 두세시간 정도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대화를 해.)








유대인들은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태아에게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브루타를 한다. 하브루타는 짝을 지어 질문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며 논쟁하는 것이다. 이기기 위한 논쟁을 하기 보다는 함께 '계발'되는 것을 목적으로 둔다. 설득력 있는 토론을 하는 법과 특히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만 골라서 듣는 것이 아닌,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듣는 경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브루타는 정답이 없고, 질문으로 가족의 소통을 이끌어낸다. 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듣고자 하는 답도 말해야 하는 답도 없다. 생각을 말하고 경청을 한다. 가족의 대화에 우선순위를 두고 일주일의 시간을 정한다. 그 시간에 마음을 들인다. 



라미스의 가족은 정기적으로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4층집에 사는 4대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날. 피치 못할 사정을 제외하고는 라미스가 기억하는 한 금요일 모임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다리가 불편한 증조 할아버지부터 라미스의 동생들까지 한 식탁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한단다. 하하호호 떠들썩한 식사 자리는 오후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오후 살레(살레는 하루에 네 번하는 이슬람기도를 말한다)까지 시간을 보내고 정리한다고. 그 시간만큼은 친구 초대나 친척들의 방문보다 가족의 시간에 우선순위를 둔다. 우선순위.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 가운데 무엇을 우선시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이들은 가족의 시간을 우선순위로 세웠다. 일주일 동안 각자의 삶에 새로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거기서 느꼈던 점들을 이야기하고, 일상을 공유하며 관계에 깊이를 더한다. 질문하고 서로의 생각을 얹고 다지는 시간. 모두 이 시간을 기다린다.



라미스는 똑부러지는 성격을 가진 아이도, 꿈을 찾아 떠나는 모험심 많은 친구도 아니다. 그녀는 보다 전통에 순응했지만 무언가 자신감이 있었다. 좋은 엄마가 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늘 말했고, 그래서 영어를 배운다고 했다. 자기는 예멘을 좋아하고 예메니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했다. 평범한 예메니 여자들처럼 관습에 수긍하며 그 자리에 평생 머무르지 않았다. 충분히 조국을 사랑하고 이 땅에 삶을 헌신하는 태도로 예멘 문화를 받아들였다. 가족의 강한 유대감과 안정감 안에서 그녀는 충분히 전통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잘 지켰다. 라미스는 정체성이 올곧은 아이였다. 자신의 심지가 분명한 친구. 외국인인 나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동시에 자신의 생활과 생각을 가감없이 공개하는 투명함. 소녀같은 순진(純眞)함은 가족 안에서의 순전(純全)함에서 나왔구나.



아이와 종일 집에 있을 때는 한참 지난 것 같아 시계를 보니 겨우 5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가 기관을 다니기 시작하니 시간은 째깍째깍 두 배는 빨리 지나는 듯하다. 등원, 하원 시간을 맞추고 그 이후의 일정들을 계획하니 시간이 모자른다. 마음이 점점 급하다. 이 시간까지 저걸 다 마쳐야 그 다음 일정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는데, 오늘은 벌써부터 미스가 나기 시작한다. 바빠서 아이와 대화할 시간이 없다. 계속 이거 하고 저거 하고 지시 명령어만 쓴다. 바쁘니까 아이의 눈을 마주칠 시간도 없고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의 표정도 그냥 지나친다. 아이를 위한 일인데 거기엔 아이는 없는 느낌. 아이가 좋아할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아이보다 내가 더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잠시 멈춤. 


말 못하는 아이라고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닌데. 나는 어쩌면 내 결정이 아이의 말을 대신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이건 이렇게 하자'를 아이와 대화하는 것이라 착각했던 것인지도. 나는 잠시 멈춘다. 아이의 얼굴을 본다. 샐쭉해진 눈을 보고 뾰로퉁한 입술을 보고 불룩한 볼을 만진다. 나는 아이의 표정을 읽는다. 아이에게 질문을 하고 짧은 대답이 돌아오면 다시 새로운 질문을 한다. 어디를 '가기'보다 무엇을 '하기'보다 그냥 '있기'를 하고 아이의 말을 귀담아 '듣기'를 한다.



가족 내에서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힘. 루틴의 잠재력은 무섭다. 이는 안정감을 만든다. 안정감 속에서 강한 힘이 생긴다. 강한 힘은 곧 그 가족의 정체성이 된다. 정체성이 강한 아이는 삶의 중심에서부터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 라미스 가족처럼 함께하고 듣는 시간, 질문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정해야겠다. 내가 아주 사랑해 마지 않는 이 말을 되새기며. 


Strong family Stronger 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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