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멈추었다. 알렉스는 좌석 위 선반에서 큰 트렁크를 조심스럽게 내려 끌고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한 손에는 작은 손가방을 들었고 다른 쪽으로는 큰 트렁크를 들었다. 큰 트렁크가 손가방과 너무 비대칭적으로 차이가 나서 걸을 때 뒤뚱거리며 걷게 되어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도드라지게 알렉스에게 집중된다. 알렉스는 그렇게 느꼈다. 주변 사람에게 길을 물어본다. 어느 40대 남자가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킨다. 너무 어릴 때 와서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행인이 알려준 대로 방향을 잡고 걸어간다. 눈이 많이 내려 온통 세상이 하얗다. 하얀 세상가운데 알렉스의 검은 양복 정장은 눈에 탁 들어온다. 이미 사람이 걸어간 듯한 눈길이 보인다. 움푹 파인 그 길로 알렉스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뒤뚱거리며 걷는다. 가방에는 미술도구가 대부분이다. 옷도 몇 개 있지만 그림을 그리려고 온 이상 많은 옷은 필요하지 않았다. 작은 실개천이 나온다 아니 눈길이 그 실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개천 건너 성이 희미하게 보인다.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 이내 땀이 나기 시작한다. 눈길은 어느덧 개천을 건너는 나무다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두 개의 작은 언덕 사이로 육중한 아치형의 건물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여 여기부터가 마을입니다 하고 알려주는 환영인사 같았다. 총 3단으로 연결된 아치는 높이가 거의 70 미터 이상 되는 것 같았다. 3층 아치 위로 얼핏 사람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전체적으로는 거대한 성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 잠깐 어머니와 함께 왔었는데 왜 저기는 기억이 안 나지? 하는 의문을 품으며 알렉스는 아치형 게이트를 통과했다. 통과하자마자 아까보다 더 큰 개울이 등장했고 마찬가지로 개울을 건너는 나무다리가 있다. 이 마을은 참으로 아릅답다. 강물이 휘돌아나가면서 그 가운데 마을이 들어앉아 있는 형국이다 강이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 마을은 온통 눈으로 덮여 겨울왕국을 이루고 있고 왕국을 보호하는 해자처럼 강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알렉스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어머니와 저 강가에서 물놀이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고향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이유가 있었다. 눈이 많이 왔지만 오늘은 맑은 날이었다. 정오의 햇살이 강물에 비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풍경화의 한 장면 같았다. 다리 건너 오른쪽 첫 번째 카페. 알렉스가 아저씨와 약속한 장소였다. 시간은 오후 한 시. 알렉스는 시계를 보았다. 12시 50분. 늦지 않았다. 짐을 들고 카페의 문을 들어섰다. 얼굴에 수염이 덮수록한 40대의 중년 남성이 알렉스를 반겼다.
“알렉스! 너구나”
“아저씨”
“이게 얼마 만이냐”
손을 맞잡는다. 40대의 중년 남성은 알렉스를 기쁘게 맞이한다. 어머니의 이웃친구 한스 아저씨였다.
전보를 쳐서 아저씨와 미리 연락을 했다. 아저씨는 그림을 그릴 작업실과 잠잘 곳을 마련해 놓기로 했다. 친한 친구의 아들이 이곳에 온다고 했을 때 두 말 않고 자신의 일처럼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들을 처리해 주었다. 고마운 분이다.
“한 15년 넘었지요. 어머니 따라 어릴 때 잠깐 왔었으니까. 기억이 가물가물 해요. 아름다운 강이 있었던 건 기억이 나고 물놀이도 기억이 나고 , 아저씨도 기억이 나고”
“하긴 니 어머니가 결혼해서 도시로 가 버리고 난 뒤 한참 후에 5살짜리 아들 데리고 마을로 잠깐 왔을 때였지. 니 어머니 결혼해서 도시로 갔을 때는 얼마나 서운했던지. 왜냐하면 내가 니 어머니를 속으로 좋아했거든”
한스는 쑥스러운 웃음을 짓고 알렉스는 함께 웃으며 쑥스러움을 덜어준다.
“여기서 그림을 그릴 생각이에요. 조용하고 아름답고 너무 좋아요. 작업이 잘 될 거 같아요.”
“네가 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보를 줄 때 처음 알았다. 그래? 유명한 화가가 된 거니?”
“아뇨, 이제 시작하는 단계인데요. 그래도 제 친구 화가 중에는 유명한 사람도 있어요”
“그렇구나. 자 작업실로 가봐야지 네가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여기서 멀지 않아.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어. 2층에 있는 다락방 형태야. 꽤 넓은 편이지”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많이 도와주셔서”
“별소리를, 내가 니 어머니와 얼마나 친한 사이였는데 이 정도 가지고 뭘”
한스와 알렉스는 걸어서 작업실로 갔다. 빛도 잘 들어오고 널찍한 2층의 공간이었다 1층은 침실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요. 아저씨”
“그래 식사는 저 건너편 레스토랑도 있고 아니면 간단한 것들은 직접 만들어 먹고, 내가 가끔 가져다주기도 하마. 일단 짐을 풀고 쉬도록 해라..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아 참 혹시 16세에서 17세 정도의 소녀로 모델을 구할 수 있을까요? 모델이 필요한데”
“모델이라 한 번 알아보마, 초상화 같은 거 그릴 계획이구나”
“음….. 네. 그냥은 아니고 모델료도 지불합니다.”
“그래 한 번 알아보마”
그날 저녁 책상 위 등불이 켜져 있고 알렉스는 친구 클레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친구여 잘 있는가? 난 지금 어머니의 고향에 와 있다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의 강과 다리를 너무 보고 싶다며 그리워하셨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네. 나의 기억 속에서도 이곳은 아름 다운 곳으로 남아 있었어. 오늘 여기 다시 와보니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 그리고 왜 어머니가 여기를 그토록 그리워했는지도 이해할 것 같아. 친구여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는가? 얼마 전 이집트에 다녀왔다고 하던데 무얼 보고 왔는가? 작업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었는가? 친구여 나는 언제나 그대의 재능에 감탄한다네. 나도 자네의 친구로서 걸맞은 사람이 되려고 무척 노력한다네. 이곳에서의 작업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면 좋겠네. 얼마 전 또 작업의뢰를 받았다고? 축하하네
도시 곳곳에 자네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친구로서 자랑스럽네. 나는 여기서 새로운 몇 가지 시도를 해보려고 하네. 내 직관이 가리키는 대로 원 없이 작업하려 하네. 아무쪼록 다시 연락할 때까지 잘 지내고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네”
알렉스는 봉투에 다 쓴 편지를 넣고 풀을 부친 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스듬히 경사진 천장의 창문을 힘껏 밀어젖혀 열었다. 별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2,
아주 지독하게도 파란 하늘이었다. 그 하늘 바로 아래 구름이 군데군데 하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햇빛은 지상을 향해 맹렬히 내려오다 얼룩을 만나 거친 물살이 암초를 만나 갈라지듯 갈라져 더욱 강렬하게 지상을 향해 내리퍼부었다.. 얼마나 그 기운이 강렬한지 여러 줄기로 갈라진 빛이 너무나 선명해서 칼처럼 내리 꽂히고 있었다. 강과 충돌한 햇살은 산란을 일으켜 강 여기저기로 번져 번득이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알렉스는 그 강가를 조용히 걷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걷지 않았기에 내딛는 발자국마다 흔적이 남았다. 발목까지 꺼지는 탓에 조금 힘들었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처음으로 간다는 나름의 해석을 붙이며 열심히 걸었다. 그때였다.
“이게 누구야 알랙스 아니니?”
알렉스는 눈을 들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넌 잘 모를 거야 나 네 엄마 고향친구 캐서린이야. 한스가 누가 온다고 전해줬는데 너구나”
“ 아! 캐서린 어머니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어머니의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고”
“호호 라이벌? 아니란다. 니 어머니는 나한테 상대가 안…… 아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안녕하세요.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야! 어린 시절 얼굴이 많이 남아 있네, 엄마 얼굴도 보이고. 그래 엄마 고향에 휴가차 온 거니?”
“아뇨 그림을 그리러 왔어요. 전 화가입니다.”
“오호, 네 엄마가 그림을 좀 잘 그렸지. 역시 너도 네 엄마를 닮은 게로구나”
“그런가요 어머니는 저한테 그림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서”
“야 그래도 아들이라서 그런지 듬직해 보이네. 난 딸 년만 둘인데 요것들이 얼굴 꾸미고 밖으로만
싸돌아 다녀서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닌데”
“캐서린! 나중에 엄마 학창 시절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좋지, 얼마든지, 내가 식사를 한 번 초대하마. 그때 많은 이야기 나누자”
“네 아주머니 만나 봬서 반가웠어요”
알렉스는 강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풍경 곳곳을 마음에 담았다. 밤에도 또 와 볼 생각이다. 지붕의 색깔이 너무 곱다. 특히 저 노란색 지붕은 무척 인상적이어서 그림에 담고 싶었다. 알렉스는 또 무얼 그릴지 떠올려 보았다. 알렉스는 여성의 몸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평소에 많이 했다. 꼭 그려보고 싶었다. 어머니의 고향에서 첫 작업을 해 볼 생각이다.
3.
아틀리에 다락방. 약간 어두운 가운데 창문을 열자 빛이 쏟아진다. 쏟아지는 빛의 절반만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의자를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모델이 앉아 있다. 알렉스는 한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이젤을 설치하고 작업준비를 마쳤다. 모델이 입고 온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이 뭐예요?”
“로즈예요 아미린 로즈”
“지금 몇 살인가요?”
“17살이에요.”
“고등학생?’
“아뇨, 중학교까지만 다녔어요. 도시로 갈 거예요. 가서 패션모델이 될 거예요”
“그림 모델 해 본 적 없죠?”
“네 없어요. 하지만 잘할 수 있어요.”
“생각보다 힘들어요.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고. 그래도 잘할 수 있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너무 거칠고 투박해요. 실루엣이 안 나와요. 음영도 잘 안 나오고. 다른 옷이 필요한데.”
알렉스는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자신의 옷 가운데 가장 얇고 하늘 거리는 셔츠를 찾아왔다.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는 그림모델에게는 적당하지 않아요. 이 옷을 줄 테니 저기 가서 갈아입고 와요.
“치마가 없잖아요”
“셔츠가 길어서 괜찮을 거예요. 한 번 입어 보세요.”
셔츠로 갈아입고 온 로즈가 의자에 앉았다. 훨씬 나아졌다. 얼굴과 옷의 음영이 잡힌다 게다가 몸의 실루엣도 희미하게 드러난다. 하체의 굴곡도 보인다. 다리가 길어서 훨씬 선이 고왔다.
“네 좋아요. 몸을 약간 틀고 시선을 15도 위쪽으로, 네네 좋아요 그 상태로 그대로”
한두 시간인가 집중해서 그림을 그렸다. 이제 어느 정도 손이 풀렸다. 로즈도 좀 익숙해진 듯
표정도 자연스럽고 살아 있다. 그런데 계속 같은 포즈로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알렉스는 로즈가 더 자연스럽고 과감해질 수 있도록 긴장을 풀어주어야 했다. 말을 계속 걸었다.
“표정이 아주 좋아요. 패션모델을 해도 잘할 거 같아요, 대꾸는 하지 말고 듣기만 해요
표정이나 자세가 흐트러지니까”
로즈의 입가에 웃음이 살짝 배어 나온다. 한층 편해진 모습이다.
첫 번째 스케치를 마쳤다. 다른 자세가 필요했다. 알렉스는 새로운 포즈를 주문했다.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위에 걸치고 그렇지. 셔츠의 단추를 두 개만 풀어봐요”
이미 모델로서의 역할에 몰입한 로즈는 아주 자연스럽게 셔츠의 단추 두 개를 풀었다. 가슴이 보일 듯 말 듯 본능적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알렉스는 빠르게 스케치로 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잡아냈다. 고도로 섬세한 작업이었다. 두 개의 봉긋하게 솟은 젖무덤이 와이셔츠에 가려 절반쯤 드러나고 옅은 핑크색 돌기들이 살짝 드러날 그 정도의 순간을 잡아냈다. 무척 마음에 드는 작업결과였다. 오전 작업을 마쳤다. 오늘은 스케치만 할 생각이었다. 오후에도 더 다양한 포즈로 스케치를 할 계획이었다.
“가서 식사를 하고 두 시까지 오세요”
알렉스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그리고 싶은 장면들이 영사기의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더 아름다운 장면, 궁극의 근원적 아름다움을 꺼내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갔다. 다리 근처에서 한스 아저씨를 만났다.
“아 알렉스, 어때 소개해준 모델은 맘에 드는가?”
“네 아저씨, 좋아요, 잘해요.”
“그 친구가 모델한다고 공부도 때려치우고 도시로 가겠다고 해서 부모들이 걱정이 태산인데
뭐 어쩌겠어 자기가 좋아서 하겠다는데. 딱 봐도 모델이잖아 키도 크고 늘씬하고.”
“그렇군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덕분에 작업이 잘 진행되고 있어요.”
“그래, 근데 좀 일찍 보내줘야 돼, 안 그러면 금방 소문 나, 이 동네가 작잖아 “
“네 알겠습니다”
“밥 먹으러 집에 한 번 와 엄마 학창 시절 때 사진도 구경하고”
“이번 주말에 갈게요.”
“그래, 준비해 놓을 게”
4.
“친구여, 작업은 어떤가? 나도 이제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네. 여자의 몸을 통해 다양한 이미지를 포착해 보려 하네. 자네도 전에 말한 적이 있지. 가장 아름다운 게 사람의 몸이라고. 원초적인 에너지가 거기에서 나온다고. 나도 그 경험을 해 보려 하네.. 내가 무엇을 느끼게 될지 나도 궁금하네
자네의 작업은 어떤가, 여기에서의 작업이 끝나면 자네한테 가서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보고 싶네.
잊지 않았지? 자넨 나의 스승이라는 걸. 나는 정말로 자네에게서 많은 걸 배운다네.”
아틀리에
로즈가 준비해 옷 여러 가지 옷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즈, 새로운 걸 시도해 보려고 하는데 할 수 있을까?”
“어떤 거요?”
“상반신 노출!”
약간 놀란다. 알렉스는 계속 설명을 이어나간다.
“가장 아름다운 게 사람의 몸이지. 그걸 부끄러워하면 안 돼, 로즈. 자신의 아름다운 몸과 그걸 자랑스러워하는 당당한 그 표정, 자유로운 표정을 담고 싶어
주위의 시선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너 스스로 자유로워야 해!”
“한 번 해 볼게요”
의자에서 일어선 로즈는 천천히 몸을 돌린다.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는다. 어깨가 드러나고 등의 굴곡이 드러난다.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 알렉스를 바라본다. 아직 수줍은 듯 두 팔을 가슴에 껴안고 있다.
“두 팔을 내리고 세상을 아래로 보는 듯한 표정으로”
팔을 내린 로즈는 가슴을 펴고 알렉스를 응시했다. 이미 당당했다. 가슴이 말해주고 있었다. 몸과 표정이 반대로 놀고 있었다. 표정이 따라가 주기만 하면 완벽했다.
“나를 의식하지 말고 본인한테 집중해, 로즈가 자유롭고 당당해야 표정이 살아나고 나는 그걸 그림에 담을 거야”
시간이 지나자 로즈는 점점 자유로워졌다. 동작이 자연스러워졌고 표정이 살아났다. 흔들리는 가슴과 창문으로 들어온 조명이 절묘하게 교차하면서 계속 음영을 만들어냈다. 입체감이 살아났다. 분홍의 돌기는 시선을 붙잡아두는 포인트의 역할을 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연필을 움직였고 그때마다 절정의 순간들이 박제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그것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본 대로 그리지 않았다. 느낀 대로 그렸다. 투박하고 엉성한 터치 속에 대상의 특징만 잡아내는 놀라운 능력으로 그림의 개성을 만들어냈다. 옷을 입었다면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그림들이었다.
한껏 에너지를 받자 알렉스는 끝까지 가고 싶었다. 충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완벽한 나신을 보고 싶었다. 로즈에게 요구했다.
“로즈 아래까지 마저 벗으면 안 될까? 근데 이건 움직이면 안 될 거 같아. 다 벗고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벌려줘”
이미 완벽한 도취에 들어간 로즈는 아무런 저항 감 없이 알렉스의 요구에 응했다. 아까와는 달랐다. 로즈는 자유로웠다. 알렉스는 세상의 근원을 보고 있었다. 생명의 근원, 거기에 다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손으로 탐색해 보고 싶었다. 연필을 들고 로즈에게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그곳으로 그곳으로
로즈는 두 눈을 분명하게 뜨고 그런 알렉스의 손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숲 그 신비를 향해 다가간 최후의 순간 알렉스는 손길을 거두고 확 돌아서 다시 이젤로 걸어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5.
며칠 뒤 마을 중심의 한 공터에서 사람들이 모여있다.
“아니 우리 딸이 요즘 하는 짓이 수상해, 매일 아침에 나가서는 저녁에 들어오는데
옷도 이상 망측하게 입고 나풀거리며 걸어가는 게 꼭 바람난 년 같아. 이게 나가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
로즈의 엄마였다. 옆에 있던 한 여성도 거든다
“거 도시에서 곱상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왔다고 하던데, 갸 집으로 들어가는 걸 누가 본 사람이 있다던데”
“자네가 봤어? 자네가 봤어?”
로즈의 엄마는 흥분해서 방금 말한 여성에게 대든다.
“아니, 나도 들은 거라서…..”
말소리가 줄어든다.
캐서린이 나선다.
“아이 그럴 리가 걔 엄마를 내가 잘 아는데 그럴 애가 아닌데. 순둥이에 모범생 스타일인데, 착하고”
“아니 글쎄 본 사람이 있다니까?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 집에 들고 나고 하는 걸. 게다가 안에서 홀딱 벗고 있다고 하던데.”
어느 누군가가 말했다.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로즈의 엄마는 화를 감추고 못한 채 씩씩거렸다.
“그럼 한 번 가보자고”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마을 여성들이 우르르 몰려가다가 한스를 만났다.
“아니 오전부터 왜들 이리 몰려서 다니는 거야? 무슨 일 있어?”
“도시에서 온 청년 지금 어디 있어요?”
“아마 작업실에 있을 걸, 그 친구 그림 그리는 화가인데. 왜 무슨 일이야?”
아틀리에
며칠 째 전신 누드화를 계속 그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포즈도 그리고 간이침대를 만들어 놓고 누워서 다리를 벌린 장면도 그렸다. 다양한 포즈의 그림을 그리면서 로즈는 이제 거의 수준급 모델의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아래는 입고 위에는 벗은 포즈, 아래는 벗고 위에는 입은 포즈 등
아주 다양한 형태로 그림을 스케치했다. 채색은 나중에 한꺼번에 할 생각이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의도였다. 한참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아래층에서 시끄운 소리가 들렸다. 로즈는 급하게 옷을 찾아 몸을 가렸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2층으로 올라왔다. 2층의 작업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웅성웅성거렸다. 구석진 곳에서 몸을 가리고 있는 로즈를 발견한 로즈의 엄마는 로즈의 팔목을 잡고 계단 쪽으로 끌고 갔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이게 뭐야? 아이고 내가 못살아. 빨리 집에 가자”
대충 옷을 입게 하고 집으로 데려갔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렉스를 응시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왜들 여기로 몰려오신 겁니까?”
캐서린이 나섰다
“알렉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뭘 하긴요? 그림을 그렸죠”
“그림을 그리는 데 왜 저 아이가 옷을 벗고 있었지?”
그 순간 알렉스는 뭐가 문제가 되었는지 깨달았다. 설명을 잘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여성의 몸이 아름다워서………..”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의 얼굴표정을 보니 알렉스의 설명이 먹혀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느 여성이 한 마디 한다.
“쟤가 몇 살인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하는가?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야”
“우리는 추잡한 것을 제일 싫어해. 우리 마을에서 이런 불장난이 생기는 걸 용납할 수 없어.”
“그게 아니라. 하…………..”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너무 간극이 컸다. 저들이 살아온 세계와 알렉스가 추구하는 세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세계였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왜 내가 이 생각을 못했지? 알렉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않았다. 오로지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우리 마을을 떠나 주게. 더 이상 시끄러운 일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네. 내일 아침 날이 밝은 대로 여기를 떠나게”
캐서린이 중재에 나섰다. 한스도 한 마디 했다.
“아니 알렉스 말도 들어봐야지. 알렉스는 단지 그림을 그리려고 한 건데”
“한스 당신은 나서지 말아요.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딸 가진 부모들이에요”
모인 여성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한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여기를 떠나겠습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알렉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렇게 정오의 해프닝은 막을 내렸다. 모두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6.
친구여. 사람들이 나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고 있네. 많이 아프다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나의 노력이 사람들에게는 더러운 욕망으로 보였나 보네. 나는 지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벽에 부딪쳤네. 왜 아름다움의 기준이 나와 다른 거지?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왜 표현해서는 안 되는 대상인거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네. , 관습과 도덕에 대해. 내 안에서 불타오르던 창작의 열망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네. 누군가가 내 열망을 가로채갔어, 나의 욕망을 빼앗겼어. 이건 옳지 않아.
자네도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나? 생전 처음 느껴보는 절망이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 일시적이겠지? 설마, 열망이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그곳으로 가서 자네를 만나야겠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표현에 제한이 있어야 하는지 한 번 진지하게 대화해 보자고. 오늘밤은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네. 왜 저렇게 별은 또 밝은 거야. 나의 마음도 몰라주고.
내일 나는 이 마을을 떠나려 하네. 다시 올 수 있을까? 잘 모르겠네. 친구여 그곳에서 보자고.
다음 날 아침.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치고 마을 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다리 입구에서 로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야무지게 알렉스에게 말을 건넨다.
“난 반드시 이 마을을 떠날 거예요. 도시에서 만나요 당신은 진짜 화가로, 나는 멋진 모델로. 우리 그리다 만 그림을 꼭 완성해요.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로즈는 손을 흔든다. 알렉스는 말없이 다 듣고는 걸음을 재촉한다. 아치를 지나 저만치 걸어가던 알렉스는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처음 올 때 보았던 웅장한 아치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때는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던 저 아치가 이제는 나를 가로막는 거대한 성처럼 보였다. 다시 발길을 돌려 눈길을 따라 걷는다. 갑자기 알렉스가 눈길 밖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로운 길이 하나 생겨났다. 작지만 희미한 새 길. 알렉스는 눈길을 헤치며 계속 묵묵히 걷는다. 하나의 시작점에서 갈라져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