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램즈이어 May 22. 2024

신전들의 계곡에서

아그리젠토, 시칠리아 풀리아 여행기

 시칠리에서 만나는 웅대한 그리스 신전들은 반갑지만 기이하게 느껴진다. 시칠리아 외세 침탈의 역사를 부지런히 공부하고, 그리스 유적을 보게 될 거라고 분명히 알았지만 막상 부딪치니 생소한 감정이 올라왔다. 소박한 혼혈 아가씨(시칠리)와 소개팅 약속을 잡아 나갔더니 갑자기 출중한 서양 미인(그리스)이 나와 있는 느낌이랄까. 좋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하다.

 아그리젠토(Agrigento)는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 점령 시기에 아크라가스(Akragas)의 이름으로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였다. 폭군 팔라리스왕의 놋쇠 황소에 대한 이야기도 이곳 신전을 지을 때였고 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활약했던 곳이다. 카르타고의 점령하에 있던 기원전 261년에는 로마가 4개 군단을 파견하며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도시이기도 하다.

 중세의 아그리젠툼(Agrigentum)에 이어 2차 대전 종전 후부터 오늘날의 이름으로 불린다. 기원전 450년 경에 세워진 신전들의 터에 거대한 고고학 공원이 만들어졌다. 

 신전들의 계곡(The Valley of Temples)에서는 기대 밖의 일들을 많이 만났다. 신전들은 계곡이 아니라 황량히 높은 언덕에 우뚝 서 있다. 입구로부터 옛적에 성벽이었다는 12킬로 길을 따라 걷게 된다. 드문드문 그 잔해인 듯한 오래된 돌기둥들을 만나고 멀리 어렴풋이 바다가 보인다. 그늘이 없는 흙길이지만 군데군데 몇백 년 됨직한 올리브와 아몬드 나무가 반겨준다. 반대편은 다양한 꽃과 선인장 등 갖가지 식물이 자라는 풍성한 정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정원의 이름이 '콜림베트라'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

 초기 기독교도들의 카타콤 잔해, 카스토르와 플룩스 신전(Temple of the Dioscuri 디오스쿠리 신전),

제우스 신전의 폐허에 재구성해 놓은 거인 텔라몬 상 (the giant Telamons)은 미처 보지 못했다. 광활하게 넓어서 모두 보려면 이틀 정도 꼬박 걸릴 것이므로.

 한참 걷다가 시야에 콩코르디아 신전의 모습이 들어오니 마음이 벅찼다. 뭉클하다고 해야 할지, 두려움과 떨림이라고 해야 할지, 환희라고 해야 할지, 웅장한 신전을 바라볼 때의 감흥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다. 2500년 전 옛사람들의 신심(信心), 갈망과 열정, 수고과 땀, 피흘림등이 가져다주는 감동일 것이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광활한 요동 벌판을 보고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곳이로구나. 통곡할만하다"라고 했던 대목이 생각났다.

 기원전 430년에 세워진 콩코르디아 신전 (Temple of Concord) 은 보존 상태가 좋아 이곳의 주인공인 듯하다. 엄위하게 아름답다. 왕들의 야심과 설계를 맡은 학자들의 지혜와 신성한 노동력을 바친 허다한 노예 사람들의 숨결을 헤아려본다. 중세에는 교회로도 쓰였고,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닮았으나 유네스코 로고의 진짜 모델이다.

 조금 더 걸어가면 기원전 510년에 세워진 헤라클레스 신전(Temple of Hercules)의 몇 안 되는 기둥들이 있다. 이름에 걸맞은 위용이 있었을 텐데 옛 모습이 무척 그립다.

 콩코르디아 신전의 옆 앞쪽으로 이카루스 청동상이 누워 있었다. 폴란드의 강렬한 인체 조각의 설치 미술가 이고르 미토라이 작품으로 2011년부터 전시되었다 한다. 청동의 얼룩이 예스러워 마치 이카루스가 크레타 섬 부근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곳에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 둘레에서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치 신전에 버금가는 고고한 유적인 양, 혹은 유명한 미술 작품이라서? 여러 글에서 콩코르디아 신전과 어울린다며 너그러이 봐주고 있는데….   

 나는 그 작품 자체로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거기 있는 것은 바운더리를 침해한 것 같은,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축미를 자랑하는 신전처럼, 함께 인간의 예술 작품 카테고리에 들어가겠지만…. 2500년 전의 신성한 유적지에 2000년대의 설치 미술이 감히 끼어든 것 같은. 

 또 뭔가 마음이 불편해진 것은 상상력이 방해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유적의 자취에서 고대로의 시간여행을 하며 그때 사람들과 어떤 교감을 나누고 있는데 (가벼이 마음속에서라도) 현대 작품이 그 흐름을 깨버린 것 같은.

 입구 부근에 있는 헤라 신전(Temple of Hera)은 돌기둥이 두텁고 푸근했다. 푸른 지중해가 잘 보이며 풍경이 가장 좋은 곳에 세워져 있다. 비교적 한산해서 서로 독사진도 많이 찍어주며 찬찬히 거닐어도 보았다. 암탉 부근에서 종종종 노니는 병아리 떼처럼.  


헤라의 신전에서/                                                        신전 가는 길의 돌 성벽 잔해


콩코르디아 신전 앞의 이카루스 청동상 /                                                                      헤라클레스 신전
디오스쿠리 신전/            제우스 신전 터의 돌로 재구성한 거인 텔라몬상



** 사진: 램즈이어와 그의 동료들

(헤라클레스 신전, 거인 텔라몬, 디오스쿠리 신전 이 세장은 현지 발간 시칠리아 소개 책자에서 얻은 것임)


매거진의 이전글 막시모 극장의 로얄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