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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기억될 복된 소수

『헨리 5세』를 읽고

by 램즈이어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중에서 중간 정도 인기를 얻고 있는『헨리 5세』는 영화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 같다. 2019년에 개봉한 넷플릭스의《더 킹: 헨리 5세》가 훨씬 감동 이어서다. 미남이며 실력파인 티모시 샬라메가 젊은 왕의 고뇌와 성장을 잘 연기했을 뿐 아니라 아쟁쿠르 전투 장면도 웅장하다.

희곡에서는 이 역사적인 전쟁에서 숫자가 1/5의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쟁취한 전략이 소상히 나오지 않는다. 좁은 지형을 선택하고 진흙탕을 이용해 적은 수의 보병과 장궁병이 많은 수의 중무장 기사들을 무찌른 전술이 생략되었다. 마치 해리왕의 신앙심, 겸손함과 용맹이 어우러진 결과인 듯 묘사되어 있다. 유명한 1415년 10월 25일 전투(Battle of Agincourt) 전 날의 연설을 셰익스피어 각색으로 읽는 것이 그나마 소득이었다.


** '성 크리스핀의 날 연설'


초라한 영국군 병력에 한숨 쉬며 웨스트모얼랜드 백작이 잉글랜드인 1만 명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속마음을 내비치자 국왕의 열정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해리왕은 이 연설을 통해 병사들에게 명예, 형제애, 그리고 불멸의 영광을 약속하며 사기를 극대화한다.


우리가 죽을 운명이라면 국가의 패배를 가져오기 충분하고, 살아남을 거라면 숫자가 적을수록 나누는 명예는 더 크다네. 제발 하나라도 더 많기를 바라지 마.

오, 하나도 더 바라지 마! 차라리 전군에 공포하게, 웨스트모얼랜드, 이 전투에 구미가 당기지 않는 자는 떠나라고 말이야. 통과증을 끊어주고 지갑에는 여행비를 넣어 줄 테니까. 동료로서 짐과 함께 죽기가 두려운 자, 짐은 그런 사람과 함께 죽고 싶지 않아.

오늘은 크리스핀 성자의 축일이네. 오늘을 살아남아 무사히 귀환하는 사람은 오늘의 이름이 들릴 때 우쭐할 것이고--- 그런 다음 소매 걷어 흉터를 내보이며 “이 상처를 크리스핀 날 입었다.” 말하리라. 노인들은 잊겠지. 하지만 모든 게 잊혀도 그날에 그가 이룬 업적들은, 좀 덧붙여 기억할 것이야. 그럼 우리 이름은--- 곧잘 쓰는 말처럼 그의 입에 익어서 넘치는 잔을 통해 새로이 기억될 것이야. 그는 이 애기를 아들에게 가르쳐서---

우리 소수, 복된 소수, 우리 형제 부대가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그 애기를 통하여 기억되지 않고는 절대 그냥 안 지나가리라.

오늘 나와 더불어 피 흘리는 사람은 내 형제가 될 것이다. 아무리 저급해도 오늘 일로 고귀한 신분이 될 테니까. (4막 3장 20-65)


** 사랑의 속삭임


해리 왕이 프랑스 원정에 나설 때 그는 싱글이었다. 전쟁의 승리로 그가 요구한 1순위는 샤를 6세의 딸 캐서린을 왕비로 달라는 것이다. 정략결혼이 당연하던 때라 프랑스 왕위까지 염두에 둔 조건이었으리라. 한 톨의 로맨스도 들어갈 여지가 없는데, 5막에서 두 사람이 초고속 썸 타는 장면이 등장한다. 글이 문학에 속하고, 희곡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 작가의 입장에 수긍이 가기는 하다. 일종의 팬서비스일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면에서 훌륭했던 해리왕이 자신을 초라하게 일컬으며 구애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그럼에도 내 혈기가 내게 아첨을 시작하면서, 볼품없고 가슴 녹이는 효과도 없는 내 용모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날 사랑한다고 말하네요. 이제 내 아버지의 야심은 욕 좀 먹어라! 내가 생겼을 때 그는 내란을 생각하고 있었소. 그러므로 난 쇠붙이 면상과 더불어 뻣뻣한 겉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귀부인들에게 구애하러 가면 그들은 깜짝 놀라죠. 하지만 참말로, 케이트, 나이가 들수록 난 나아 보일 거요. 내 위안거리는 미모를 구겨 놓는 노년조차도 내 얼굴은 더 이상 망쳐 놓지 못할 거란 사실이오. 그대가 날 갖는다면 최악의 상태인 나를 갖고, 그대가 날 쓴다면 난 쓸수록 더 나아질 겁니다. 그러므로 말해 줘요, 가장 고운 케이트, 날 가지겠소?

(5막 2장: 228-239)


** 마지막 멘트의 여운


내숭인지 겸손인지 자신의 희곡에 대하여 형편없다고 표현한 부분이 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해설자의 입을 빌어.

지금까지 거칠고 능력 없는 글 솜씨로 좁은 곳에 막강한 인물들을 가두고 그 영광의 전 과정을 가끔씩 망치면서 겸손한 작가는 이 애기를 따라갔습니다.


처음에는 대문호도 자신을 이렇게 생각할 때도 있구나 하며 위로를 얻었다가, 이렇게 말한 이유를 깨달았다. 셰익스피어가 헨리 5세를 존경하며 위대한 왕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닌 것이다. 보통의 영국인 이상으로. 그것을 백 프로 표현해 내지 못한 자신의 필력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를 나무란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이 보다 더 멋진 왕으로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헨리 5세』에서는 젊은 시절의 방랑을 청산한 해리왕이 시종일관 성품도 좋을뿐더러 여러 면에서 뛰어나게 그려져 있다. 흠 없이 완벽해서 오히려 과장이 섞인, 비현실적인 인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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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전집 9 사극 II 헨리 5세』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민음사, 2024년

『헨리 5세』를 마지막으로 브런치북 연재를 종료합니다. 처음엔 열의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여러 가지 일로 시들해져 좋은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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