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시절 어느 교수의 냉장고에서 이 물체를 발견하고는 꺼내어 잠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때마침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의 빛이 썩은 바나나에 근사한 그림자를 선사해 주었고 그림의 소재가 되어주었다.
나는 썩은 바나나에 동질감을 느꼈다. 볼품없이 상한 바나나를 그럴듯한 모양으로 바꿔주는 그림자가 꼭 숨기고 있던 욕망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때때로 '보이는 나'에 신경 쓰느라 어색한 표정을 짓던 내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기까지 했다.
그림이 좋으면 아직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것이며 당당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 그렇지 못한 현실을 외면하고 부정하려는 심리에서 기인한 허세였던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근사한 그림자의 모양이 진짜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작가가 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