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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항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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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Feb 12. 2023

바다에서 표류하다,
네 번째 이야기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희망




선박 매각의 희망 - 인도인 바이어


하루하루 나의 우울감은 커져가고 이 상황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회사가 공문이 왔는데 우리 배를 포함한 세 척의 배가 매각이 될 것 같다고 현재 배에 있는 재고를 조사해서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내가 승선 중인 배가 25년 정도 된 배였고 나머지 두 척의 배도 우리 배랑 선령이 비슷한 걸로 기억한다. 회사도 나머지 선령이 오래되지 않은 배들은 비싼 값을 받고 팔아야 했기에 일단 가장 노후된 선박을 먼저 매각하려는 것 같았다. 싱가포르에 들어가게 되면 인도인 선박 검사원과 바이어 측이 방문할 거라고 했다.


매각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소식만으로도 나에겐 너무나도 소중했다. 하루하루 버틸 용기를 주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


그 이후론 선박 매각의 희망만을 가지고 반복되는 하루였다. 낮에는 춤을 연습하고 저녁에는 자기 전까지 기관장님과 함께였다. 생각해 보자. 상사와 아침 출근부터 같이하고 일과 시간 내내 같이 일을 하고(일이란 핑계로 춤을 췄지만...) 퇴근도 같이하고 취미 생활도 함께하고 술자리까지 같이한다?


내 상태는 급속도로 피폐해져 갔다. 식량? 물? 재취업? 나는 이 끔찍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배 도서관에서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배에선 마땅히 할 게 없기도 했고 원래도 책을 좋아하는지라 배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빌려와 방에서 시간 날 때마다 쌓아두고 읽었는데 마침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미움받을 용기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건 '내 삶을 버려가면서까지 이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오면 이젠 못하겠다고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낮, 지르박 댄스타임이었다. 여자 파트너의 춤을 추고 있었는데 당연히 너무나도 하기 싫었던 나는 전날 연습을 대충 했고 계속 실수를 하기 일쑤였다. 기관장님도 내가 자꾸 틀리니까 화가 났나 보다. 나에게 그렇게 대충 할 거냐고 소리치시고 손으로 쿡쿡 찌르기 시작하더니 심지어는 나를 밀쳤다.


나는 속으로 '옳지, 지금이 기회다!' 생각하며 말했다. "기관장님! 춤 때문에 손찌검은 정말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외치며 기관실 밖으로 나갔다. 나름 용기 내어 말했지만 사실 속으론 엄청 떨고 있었다.


나의 25년 인생, 사회생활 시작 후 처음으로 상사에게 대들었고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입항 - 드디어 받은 식량과 물


나는 그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기관장님과 함께하는 일과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5~6 시간씩 뺏기던 내 개인시간은 2시간만 뺏기는 것으로 줄었고 그마저도 매일에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로 줄었다. 처음이 어려웠을 뿐 그 뒤의 일들은 일사천리였다. 본인도 손찌검한 것이 잘못임을 인지하고 있기에 내가 이렇게 나옴에도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어차피 망한 회사 저 사람 나랑 다시 만날 일 없다. 밖에서 보면 그냥 아저씨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실제로 그 이후로 다음 회사로 같이 이직하였지만 같이 승선은 하지 않았고, 그 이후 다른 회사로 넘어가게 되면서 이 사람과의 연은 아예 끊겼다.


그러던 와중 희소식이 찾아왔다.


극도로 조금 남은 식량이랑 물을 최대한 아껴 쓰고 있었는데 이젠 어느 정도 배의 매각 날짜도 잡히고 하여 그날까지만 버티기 위한 한 번의 식량을 수급받기 위해 싱가포르에 입항한다고 했다. 전에 싱가포르에 입항하면 배가 억류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입항을 하느냐 궁금하실 것이다.


우리 배는 주말에 입항을 했다. PSC*라고 각 국가에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검사관들은 공무원이다. 공무원은? 주말은 휴일이다. 굳이 타국의 배를 잡기 위해 주말을 반납하고 나오는 공무원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배는 토요일에 입항하여 선미에 남아있던 약간의 컨테이너들을 전량 하륙했고, 필요한 식량과 물 및 약간의 부속품을 수급받고는 다시 원래 있던 바다로 나와서 앵커링을 했다.


짐을 전부 하륙한 후의 우리 배  -  대충 보기에도 선령이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도인 바이어를 대신할 사람과, 선장, 기관장이 승선했다. 그들은 일주일 정도 배를 살펴본다고 했고 우리에게 인수인계를 요구했다. 한 달 반정도 지속된 이 끔찍한 생활이 이젠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계속.



*PSC(Port State Control) - 항만국 통제 : 관할하는 국가가 자국의 검사관을 통해 자국 항만에 입항하는 외국 선박에 대하여 선박 안전에 관한 각종 국제 기준의 준수여부 등을 점검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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