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심지어 모든 생명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처럼 살아간다는 건 죽어간다는 사태 자체이나, 바로 그 사태 속에서 생명은 죽음과 맞서 싸운다. 우리네 생의 약동은, 삶의 역동성 그 자체는 진정 유전자의 번성을 위한 매개일 뿐인가? 실상의 ‘주체’는 그저 유전자에 불과한가? 생물이 그저 유전자의 존속을 위한 ‘길’에 불과하다면, 그리하여 유전자의 존속 후엔 생의 의지는 그저 뼈에 덧없이 덧붙은 살처럼 그리 무의미하게 남아 있는 부수물일 따름이던가. 허나 여기엔 어떤 도약이 없지 않다.
소위 ‘주체’라는 상상된 산물조차, 그게 비록 언제고 필수적인 추론의 매개가 될 수 있곤 하다 할지라도, 따라서 설령 이 ‘주체’라는 낱말이 언젠가 어느 다른 자명한 개념의 증명을 위한 토대가 된다손 치더라도, 주체 자체는 다만 임의적이고도 휘발성 강한 이미지와 개념 사이의 어느 골목에 불과하지 않던가. 마치 어느 ‘객체’를 정의하고 그에 따라 ‘주체’가 정의되는 양, 객관적 세계 속에서의 소통에 비롯해서 주관적 세계가, 그 소통이 불필요하다고 전제되는 가상의 자족적인 세계가 그제야 뒤따르는 양 말이다.
그와 같이, 죽음 앞의 삶이라는, 그러니까 만의 하나라도 살아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이 고통스러운 삶을 ‘굳이’ 왜 이어가야 하느냐 거나 또 번복하지 않을 까닭이 과연 어디에 있겠느냐는 이 ‘절박하고도 막막 질문’에서, 이 답-없음 속에서 우리가 비로소 붙잡곤 하는 지푸라기들이 있다. 가령 ‘주체’라는, 인과적 개념의 탈을 쓴 이미지가 그 사례일 터다. 우리는 소위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무수한 영웅들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 설령 그것이 ‘무엇(국가 혹은 민족의, 혹 인종의, 또는 개인의 권리로서의)’의 자유건 간에, 붙잡은 지푸라기가 그토록 불평등하다는 무수한 증거물들을 포함해서, 우리의 이 자유는 소위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가상의 이상적 상상의 바다를 허우적대고 있지 않던가.
물론, 불가능이 꿈꾸지 못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혹자로 하여금 꿈꾸게 하는 원인이 바로 그 불가능일지 누가 알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꾸는 꿈의 까닭을 알지 못하는 부조리 속에서 ‘무의식’을 가정하고 또 가장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욕동의 온전한 발산을 위해 오롯이 ‘자유’를 외치곤 한다. 바로 이 ‘자유’가 닿아 있는 ‘주체’라는 주관성의 신화는, 그것이 무얼 전제로 하고 있던 간에, 삶의 이유 없이는 그 삶을 이어갈 까닭이 결코 없는 행동주의 속에서는 무엇보다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로 예의 이유를 희구하고 있으리라.
따라서, 주체라는 이미지와 개념 사이의 임의적인 낱말이 어찌나 취약한지는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우리는 우리 삶에 질문을 던지곤 한다. 과연 [‘나(주체)’는 주체적(나답게)으로 살고 있는가]라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언젠가 그토록 쉽사리 무력한 ‘우울’의 그물에서 빠져나왔더랬다. ‘나(주체)’를, 설령 그 과정에서 나의 자아(주체)가 파멸할지언정, 세계(객체)에 최후의 최후까지 관철(발산)하기가 지상명령이 된 지 얼마나 오래란 말인가?
이를테면, 주체적으로 살라는 명령은 ‘어떻게’에 관한 명제다. 그러나 ‘왜’에 관해서는 철저히 외면한 명제다. 우리는 분명 ‘왜’에서 ‘어떻게’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왜’를 무시하고 ‘어떻게’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고로, 이 ‘어떻게’로 결부되어 있는 무궁한 시간성 속에서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필연성들로 ‘왜’를 채워야 할 모양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주체는 ‘내’가 아니라 ‘유전자’라는, 유전자의 존속 매개가 생물일지 모른다는 명제가 우리에게 일종의 우울증을 던져준다면, 그 명제의 비판적 진실성의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 자신이 예의 ‘주체’나 ‘자아’라는 저 헛된 가상의 체질(모델)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어찌나 깊이 고착되어 이를 전제 삼고 있었기에 이를 가상으로라도 잃는다 여기면 그토록 우울할는지 알 수 있을 양이므로.
그처럼 우리는 ‘어떻게’로 나아가기 위해 ‘왜’를 채워야 한다. 그러니까 ‘왜’의 ‘왜’는 ‘어떻게’고, ‘어떻게’의 ‘어떻게’는 ‘왜’가 아니던가. 우리가 우리 자신(자아상)을 관철(발산)하기 위해, 끝끝내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파멸의 길을 걷더라도 마침내 도달하는 자리는 어쨌거나 그저 삶의 경로들 아니겠나. 그러는 와중에라도, 우리는 우리의 결론을 남기는 게 아니라, 결론까지 걸어간 고민의 흔적들만을 그저 남길 따름이다. 또한 우리는 혹자의 흔적들 틈에서 우리 나름의 결론으로 다시 걸어갈 테다. 그러니까, 역사에게 각자가 보여줄 수 있을 것은 결론의 주입이라는 월권이 아니라, 그저 결론까지의 과정이라는 참조 사항일 뿐이겠다.
유전자가 ‘주체’인가 내가 ‘주체’인가 하는 질문 속에 있는 도약은, 마침내 우리에게 ‘주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언젠가부터 터부시되어 왔다는 일종의 부조리가 아니던가. 과연 주체란 무엇인가? 심지어 우리는 왜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나의 욕망이 과연 사회 아닌 내 욕망이 맞는가’ 질문하며, 우리는 사회가 욕망하는 게 아닌 우리 자신의 욕망을 찾아야 한다고 무턱대고 항거하기에 앞서, 과연 여기 전제된 ‘나’는 무엇이고 그렇게 가정된 ‘나’는 왜 사회가 아닌 ‘나’의 욕망을 굳이 정의하고 추구해야 하는가를 질문해야 하지 않겠나?
물론 이 지점의 질문들이 얼마나 손쉽게 소실되는지 알기란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인간은 원래 그래, 본능이라는 유전자의 프로그래밍이야 하고 그토록 경솔하고 손쉽게 돌아오는 대답들이 있다. 그에 따르면, 어떤 초월(원시)적 동어반복(체질)이 그 (시원적 ‘기분’) 안에 숨겨져 있고, 우리는 거기에 ‘왜’라고 하기보다 ‘어떻게’를 입력해야 한다는 ‘어설픈’ 발산적 도약들이 그 소실점일 테다. 그처럼 우리는 개인의 ‘무의식’이라는 유사 생물학과 사회적 계몽이라는 유사 사회학의 임시적이고 모순적인 연결 고리 속에서 부조리한 해답을 스스로에게 제시하곤 한다. 우리의 정신적이고 심리학적인 ‘왜’를 사회적이거나 생물학적인 답변으로 해소하는 양 굴며 금세 잊고는, 다시 우리의 정신적이고 심리학적인 ‘어떻게’를 향해서만 정신적이고 심리학적으로 곧장 나아가곤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해야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지‘만’ ‘우선’ 생각해야 한다]고. 물론 여기서 샅샅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저 흔한 명제가 당연한 척 가장하며 지나치는 낱개의 ‘도약’들이다.
논리의 도약, 은유의 도약은 어쨌거나 꼭 비판하기 위해서만 관찰되는 게 아니므로. 우리는 그 도약 속에서 의도를 읽어내곤 한다. 이를 위해 예의 도약이 꼭 적절하지 않을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저자는 무수한 사례 중에서 ‘왜’ ‘굳이’ 바로 이 사례를 택했는가 하는 의문 속에서 우리는 저자의 정신적 사생활을 공적인 생활로 다룰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정신적 삶은 어쨌거나 스스로 ‘사적’ 삶이라 칭할 수밖에 없음에도, 소위 ‘소통’이라는 건 이를 ‘공적’으로 다루도록 강제하고, 어떤 의미에서 소통하지 못하는 고립된 주관 세계라는 신화적 가상의 세계관이 병리적으로라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사적’ 삶은 ‘공적’ 삶 이상으로 허황된 과녁으로 그저 주장되고 있을 양이니.
우리는 도약한다. 우리는 부조리에 처한다. 우리가 우리 삶을 설명하기 전 이미 삶 자체가 이어 진행되고 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어떻게’ 살지 규명하기도 전에 삶은 전개되고 있으며, 우리가 ‘왜’를 따져보기도 전에 우리는 삶의 선택을 종용당하고 있다. 우리 삶이 살만할 것인지 따져보기도 전에 우리는 태어났다. 그럼에도 혹자에게 여기 이 ‘왜’의 문제는 생사를 가늠할 만치 절박하고도 시급한 문제일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