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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미디어들이 무수하게 선전하고 양껏 자극하는 어떤 열등감들 중에는, 소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번역되는 '선망'도 자리하고 있다. 거기서 남 '보다' 잘 살고 싶은 욕망은, 스스로 허영이라는 이름을 피하기 위해 남 '만큼' 잘 살고 싶은 욕망으로 완화되어 언급된다. 그러니까, 남 '만큼' 잘 살고 싶다는 문장 아래엔 실상 남 '보다' 잘 살고 싶은 비교 우위에 대한 노골적인 선망이 분명하게 자리하는 중이고, 또 그와 같이 번역하자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욕망은 자기 가면 아래서 끊임없이 남을 '무시하고 싶다'고 외치고 있는 셈이다. 가령 아무도 그를 무시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자신이 남을 무시하고 싶은 한, 타인을 무시하지 못하는 현재 자신의 신세는, 그러니까 과시가 불가능한 '평범'에 속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당하는 중'이라는 낡고 오래된 기묘한 자격지심은 이미 어떤 '선민의식'의 필연성을, 달리 말하자면 '나르시시즘(자기애)'을 반증하고 있다.
그처럼 무수한 자기애(나르시시즘)들이 얼만치나 소위 '평범'이라는 개념을 혐오하고, 또 이 혐오를 당연시하고자 애쓰는지 그 구조도를 살피는 일도 분명 흥미로운 일일 터다. 그렇게 보면 다른 모든 불특정 다수를 무시하고자 하는 '경쟁'이라는 문화가 이리저리 합리화하는 위와 같은 태도들 뒤에 쉬이 발견되는 열등감은, 유년기 자기 자신을 이입(투사)하던 소위 '주인공'으로부터 그가 늘 딛고 있는 평범한 현실을 계속 비교하기만 할 뿐 수긍하기는 싫은 경향성에서 여전히 발견될 수 있지 않은가. 가령 그 자신이 어떤 메시아로 발돋움하고자 그토록 애쓰더라도, 그는 '주인공'이 아니라 최소한 '현실'에서 출발해야 그가 원하던 과녁 근처에나마 도달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이런 식의 논의 자체도 일종의 이상론일 모양이다. 어쨌거나 현실의 유효성과 관련 없이 공상 속에서 스스로 꿈꾸는 증상은, 다른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야, 그리고 피해를 입는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굳이' 비난할 필요도 관심을 둘 필요도 없을 테니까.
유년기 주인공에 이입하여 주목을 받고자 애쓰는 경향으로부터, '평범'을 혐오하며 '최신'의 시류(타자들로 범벅된 시장의 인정을 토대한)를 답습하여, 끝내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자칭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증상의 경향성은 끊임없이 증식한다. 거기엔 어떤 정언명령의 '변명'이 숨어있다. 이를테면, 경제학에서 '인간은 합리적이다'라는 기본 명제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양, 그리고 거기엔 무얼 '이익'으로 여기는 동시에 '손해'로 간주하는지 등 '손익의 기준'에 관한 합의가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어 있다 간주하며 도망쳐선 더 이상 결코 돌아보지 않아 논의 밖으로 추방되어 고착된 어떤 블랙박스처럼. 그러므로 예의 선민의식이나 메시아 콤플렉스의 원인을 살피려 시도하자마자 온통 돌아오는 참견은,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명제가 '당연하다'고 기준에 대한 고민이나 검열이 없이 우선 던지는 그런 결론 어린 대사처럼 그렇게 돌아올 성싶다. 인간이 모조리 '합리적'인 게 당연한 것처럼 이기적인 게 당연하며, 그렇게 선민의식에 취해 스스로 메시아를 자칭하는 경향성이 '당연하다'는 '변명'이나, '그 누구도 평범한 사람은 없다'거나 '각자 어느 분야에서건 타고난 천재성이 있다'는 등의 일종의 선전, 그러니까 '평범성'을 혐오하는 만치 '노력' 그 자체를 혐오하는 경향성의 '선전' 등이 대답으로 돌아올 뿐이리라.
그런 낭만적인 선전이 가령 유년의 아이는 '가능성의 존재'이고,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언가 하기에 늘 '늦지 않았다'며 만들어 내는 '신화'는, 이 '신화'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각각의 문제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듬뿍 고양된 '자기애'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패턴화된 무수한 눈덩이들과 함께 서로를 점점 더 많이 상호 호출하는 중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유아를 겪는다. 발육 과정이 '문명'의 발달 과정을 축약해 둔 것이라면, 어린 시절 우리는 '신화'를 만들고 거기 의존하며 우리 정신을 건축해 왔을 터다. 일종의 확률적 불행이 누군가의 의도라는 생각, 자기 자신을 추상적으로 대입하여 자연이 인격을 가지고 있고 또 문명이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확률적인 불행이 인격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우리가 마주한 불행은 어떤 의도성 있는 불행이며, 더 커다란 계획 아래 우리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하는 어떤 의지의 일종이고, 그리하여 그렇게 가정된 누군가가 불행을 통하여 자신을 임시적으로 괴롭힌다 가정하는 경향성은, 그러니까 일종의 '절대적인 현실'에 대한 도피로써 만들어진 저 신화가, 설령 우리의 성장 과정에서 사물 그 자체의 절대적인 탐구를 통해 극복되어 왔을지라도 어떤 흔적을 남겼을 터다.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불행을 겪을 때,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언젠가 했던 나쁜 행동에 대한 대가라는 표현을 하진 않아야 할 테지만 사적인 문장은 그와 다르다.
삶을 답습하는 불행들, 그런 '우연'에 인격을 가정하여, 그런 시련들을 의인화하여 이를 극복하거나 이겨내야 한다는 표현 뒤에 있는 사고방식이 있으므로. 마치 시련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고, 그리하여 시련을 겪는 당사자가 접촉하고 고민해야 하는 대상은 시련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시련을 통해 의도를 실천하는 배후의 어떤 인격이라는 사고방식이 그러하다. 그리하여 당사자는 문제 자체보다 그것의 의미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자연 전체, 우연 전체, 필연과 운명 전체를 가정하여 자기 자신이 아닌 그러나 일종의 친밀한 인격을 부여하고는, 그러한 인격과 맞닿아 소통할 수 있는 '선민' 혹은 '선각자'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습관적으로 위치시킨다. 이를테면 과거의 '현자'의 뜬구름이 오늘날 '동기부여 전문가'의 장광설로 대치되고 있는 양. 스스로 '현자'를 자칭하는 '선민'들이, 그리하여 남과 다르다는 주장으로 '평범'을 혐오하고, 통속적인 불가능의 분석을 혐오하는 어떤 태도들이 거기 스며 있다. 거기엔 논증이나 문제 해결이 아니라, 감수성 어린 다짐이 목청을 높이며 자랑스럽게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예컨대 '나 자신을 만드는 건 <결국> 나다'와 같은 문장들이 그것이다.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의 이미지)에 관한 배타적 권리 주장은 실상 자기 자신에만 속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강요하는 주장이지만, 그 이미지가 자신의 이미지이므로, 그는 객관을 초과하는 주관성의 신화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건 자신이라는 (거짓) 신화' 위에서 우리는 소위 '새로운' 자기 자신을 창안한다고 주장하는 무수한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창안하는 그들 자신은 그들이 어디선가 언뜻 보았던 '좋아 보이던' 무수한 이미지를 짜깁기한 누더기에 지나지 않을 터다. 그들이 그렇게 기운 누더기를 통해 진정으로 가리고자 했던 건 스스로의 결핍, 트라우마 등이겠고. 그럼에도 이 누더기를 끊임없이 덧대는 작업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여기에 상상력 외에 무엇이 자리할 수 있을는지.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이리저리 기워 연장하고는, 무시당하지 않는 자신을 주장하는 동시에 누군가를 무시하는 자신을 다시 상상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상상은 끊임없이 증식한다. 결핍이라는 원점에 도달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거듭 다양하게 고치면서 <결국은> 처음과 같은 말을 하는 상상은, 그리하여 다시 시작되는 창작이 아니라 그저 같은 말의 반복일 뿐이다. 허나 저 상상이 스스로 '풍요'라고 일컫는 거품을 꺼뜨리지 않으면 추론이 될 수 없고, 상상이 추론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스스로 인식하기 싫은 '결핍'이나 '트라우마'라는 원점의 폭로로 그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갈 수도 없을 터다. 허나 저 원점의 여부와 관련 없이 오직 유효한 상상만이 추론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하여 소위 상상 속 자유로움을 자칭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는, 현실에선 모순되거나 불가능한 욕망일지라도 상상 속에서는 해소할 수 있는 그런 자신의 욕망과만 관련 있다. 여기 도용되는 자유는 오로지 욕망의 발산에 관한 자유이며, 실상 자유의 정의가 그토록 세밀하게 좁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자유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은, 철저히 주관적인 만큼이나 스스로 표현하기 껄끄러웠던 욕망의 발산에 대한 명분 부여에 불과하지 않던가(이를 때마다 샅샅이 검토하는 게 그저 상상이 이제 유효한 추론으로 거듭나는 최소한의 출발점이겠고). 이처럼 자유를 명분 삼는 상상은 '누구나' 그러할 것이라는 '당연하다'는 합리화 위에서만 겉돌며 자신의 자랑스러운 결론을 방어적으로 반복할 터다. 그러나, 그 자신의 욕망의 발산에 관계된 병렬적 상상이 아닌, 그 양상에 대한 반성이나 그 자신의 욕망과 전혀 관련 없는 탐구에의 호기심 어린 상상이라면, 아마 그건 어느 날부턴가 '추론'이라고 불리울 수도 있을 '가능성(풍요)'을 품기 시작한 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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